경제시평

AI 기술 질서에서 한국의 무대는

2026-02-19 13:00:02 게재

글로벌 기술 행사는 캘린더를 통해 이제 하나의 질서를 형성했다. 매년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CES(International Consumer Electronics Show)는 그 출발점이다. 2026년 CES에는 150여개국 4500여개 기업이 참여하며 글로벌 기술 담론의 중심 무대임을 재확인했다. 인공지능 모빌리티 로보틱스 등이 어떤 방향으로 진화할 것인지 기술 담론의 기준점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CES는 완성된 제품보다 기술의 변화 가능성과 그 구조를 보여주는 무대다.

3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리는 MWC(Mobile World Congress)는 이러한 비전을 현실로 옮기는 인프라의 장이다. 통신망 네트워크가상화 클라우드와 AI의 결합은 기술을 산업과 사회 전반으로 확산시키는 기반을 구체화한다. CES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는 자리라면, MWC는 ‘어떤 기반 위에서 구현할 것인가’를 제시한다. 9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리는 IFA(Internationale Funkausstellung Berlin)는 기술 경쟁의 결과가 시장에서 검증되는 단계다. 이처럼 CES·MWC·IFA는 비전–인프라–시장으로 이어지는 글로벌 기술 캘린더를 구성해 왔다.

대만의 컴퓨텍스 성공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이 흐름 속에서 최근 가장 주목할 변화는 매년 5월 대만에서 개최되는 컴퓨텍스(COMPUTEX)의 위상 재정립이다. 컴퓨텍스는 과거 PC와 부품 중심 전시회에서 반도체와 AI 제조 생태계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독창적인 무대로 진화했다. 설계와 표준 논의를 넘어 실제 생산과 공급망, 공정 역량을 전면에 내세우며 제조 현장에서 작동하는 AI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글로벌 기술 질서 내 존재감을 빠르게 키워왔다.

그 중심에는 엔비디아 최고경영자 젠슨 황이 있다. 그는 컴퓨텍스를 단순한 신제품 발표장이 아닌 AI시대의 제조 질서를 정의하는 독점적 플랫폼으로 활용해 왔다. 2025년 기조연설에서 그는 대만을 글로벌 AI 생태계의 핵심축으로 지목하며 GPU 설계에서 파운드리, 첨단패키징, 서버와 데이터센터로 이어지는 가치사슬이 대만을 중심으로 작동되고 있음을 선언했다. 이 서사를 통해 AI를 하드웨어로 구현할 가치사슬에 TSMC를 필두로 한 대만의 파운드리와 패키징 역량이 각인되었다.

컴퓨텍스의 성공은 우리에게 뼈아픈 질문을 던진다. 한국 역시 자국의 기술 역량과 역할을 집약적으로 보여줄 우리만의 무대를 갖추고 있는가. 2026년 CES에 참여한 한국 기업은 850여 개로 미국, 중국에 이어 세계 3위권이다. 외형적으론 고무적이나 이면을 들여다보면 성찰할 대목이 많다. 상당수 기업이 정부나 지자체의 예산 지원에 기댄 단체관 형태로 참여하고 있다. 스타트업 숫자는 늘었지만 한국이 글로벌 AI 생태계에서 어떤 책임을 맡고 무엇을 주도하는가에 대한 구조화된 메시지는 부족하다. 대만이 ‘AI 플랫폼’을 각인시키는 동안 우리는 최대 규모 참가국 명단엔 이름을 올리되 정작 무대를 주도하는 고유 서사에는 관심이 없었다.

한국은 대만과 다른 우리만의 독보적 전략자산이 있다. 우리는 반도체라는 핵심 부품부터 배터리 자동차 조선 방산 등 거대 복합시스템을 실제로 설계·제작하고 전세계에 공급해 온 제조강국이다. 인공지능이 소프트웨어를 넘어 실물 경제와 결합하는 피지컬 AI 시대에 우리의 가치는 더욱 빛날 수밖에 없고 이점이 바로 한국이 점유해야 할 전략적 무대다.

글로벌 기술 질서 속에서 한국이 차지할 무대 확보해야

한국의 무대는 전시장 안에 있지 않다. AI가 통합된 조선소 자동차공장 등 제조 인프라 자체가 세계가 주목할 리빙랩이다. 기술력을 과시하는 단계를 넘어 복합시스템 내에서 AI가 어떻게 통합되고 어떤 규범 속에서 운용되는지를 보여줘야 한다. AI가 산업 전반에 침투할 때 발생하는 윤리적·법적이슈와 안전표준에 대한 논의를 우리 현장에서 주도해야 한다. 글로벌 파트너들이 한국에서 AI의 실제 산업 작동원리를 보고 배울 수 있는 체계적인 창구를 구축해야 한다.

대만이 제조 역량으로 자신들만의 무대를 확보했듯 한국 역시 복합제조역량과 현장실무역량을 결합한 독창적인 서사를 구축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전시 부스가 아니라, 한국이 세계 기술질서 속에서 무엇을 책임지는 국가인지를 증명하는 길이다. 제조현장과 모빌리티, 국방과 공공 인프라로 확장되는 AI의 실제 작동 경험을 국제적으로 공유하고 표준화할 때 글로벌 기술 질서 속에서 한국이 차지할 무대 역시 분명해질 것이다.

김성수 연세대 특임교수 전 과학기술인공제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