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근금지 끝나면 다시 범죄 노출
국회입법조사처 “관계범죄 보호 공백” … 피해자 중심 보호제도 재설계 필요
스토킹과 가정폭력 등 관계성 범죄에서 접근금지 명령이 내려진 이후에도 범죄가 반복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다. 형사 처벌 이전 단계에서 작동하는 피해자 보호조치가 범죄 예방 장치로 충분히 기능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보호조치 제도를 피해자 중심으로 재설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최근 ‘관계성 범죄 피해자 보호조치의 한계 및 개선방안’ 보고서를 통해 현행 제도의 구조적 한계를 짚었다. 보고서는 가정폭력과 스토킹 범죄 대응에서 형벌과 별도로 운영되는 피해자 보호조치가 피해자의 안전을 확보하는 핵심 수단이라고 설명했다.
관계성 범죄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재범 위험이 높다. 범죄 이후에도 가해자가 피해자의 생활권을 파악할 가능성이 크다. 단순한 형사 처벌만으로 피해자의 안전을 확보하기 어려운 구조다.
보호조치 이후 범죄가 발생한 사례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수도권에서는 법원의 접근금지 명령이 끝난 지 일주일 만에 가해자가 아내를 찾아가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가해자는 과거 가정폭력 사건으로 접근금지 조치를 받았지만 보호기간이 끝난 뒤 범행을 저질렀다. 법원은 이후 살인 혐의로 징역 27년을 선고했다. 접근금지 종료 이후 발생한 범죄라는 점에서 보호조치 제도의 공백이 지적됐다.
관계성 범죄 대응에서 보호조치의 활용은 빠르게 늘고 있다. 대법원 ‘사법연감’에 따르면 가정폭력 사건에서 법원이 내리는 임시조치 접수 건수는 2020년 6034건에서 2024년 1만5940건으로 증가했다. 4년 사이 약 2.6배 늘어난 것이다. 2024년 임시조치 인용 건수는 1만4791건으로 인용률도 90%를 넘는다. 관계성 범죄 대응에서 보호조치가 핵심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는 의미다.
현재 관계성 범죄 대응에는 여러 단계의 보호조치가 운영된다. 가정폭력처벌법의 응급조치·긴급임시조치·임시조치와 스토킹처벌법의 응급조치·긴급응급조치·잠정조치 등이 대표적이다.
응급조치는 경찰이 현장에서 즉시 취하는 조치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리하거나 접근을 제한하는 방식이다. 이후 검찰과 법원이 긴급임시조치나 잠정조치를 통해 접근금지, 연락 금지, 퇴거 명령 등을 내릴 수 있다. 유죄 판결 이전에도 가해자의 행동을 제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예방 장치로 평가된다.
하지만 보호기간과 제도 운영 방식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행 보호조치는 기간이 비교적 짧고 연장 횟수에도 제한이 있다. 장기간 위협이 지속되는 사건에서는 보호 공백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해외 주요국의 경우 보호조치 연장 횟수에 별도 제한을 두지 않거나 장기 보호명령 제도를 운영하는 사례가 많다고 설명했다. 반면 우리 제도는 반복적인 연장 신청 과정에서 시간적·절차적 부담이 피해자에게 전가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피해자의 제도 접근성이 낮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우리 제도는 형사절차 중심 구조다. 피해자가 직접 보호조치를 신청하고 활용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가정폭력처벌법에는 피해자가 직접 법원에 신청할 수 있는 ‘피해자 보호명령’ 제도가 있지만 실제 활용은 제한적이다. 보고서는 스토킹처벌법에도 피해자 보호명령 제도를 도입해 피해자가 직접 보호를 신청할 수 있는 절차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현장에서도 제도 보완 필요성이 제기된다. 한 경찰 관계자는 “스토킹이나 교제폭력 사건은 처벌 이전 단계에서 피해자를 얼마나 빨리 보호하느냐가 핵심”이라며 “보호조치 기간과 연장 절차를 현실에 맞게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보고서에서 “관계성 범죄 대응의 핵심은 형벌이 아니라 피해자 보호체계 구축”이라며 “피해자의 안전과 권리를 중심에 둔 보호조치 제도로 재설계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접근금지 명령이 내려졌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 명령이 실제 위험을 막을 수 있는지 여부가 관계성 범죄 대응의 핵심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장세풍 기자 spja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