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채권·금 안전자산 '옥석 가리기' 중
위기 속 달러만 강세
국채, 인플레에 발목
중동 정세 불안이 다시 고조되면서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투자자들이 안전자산을 찾아 움직이고 있다. 로이터는 5일(현지시간) 전통적 피난처로 꼽히던 달러·국채·금이 제각각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안전자산의 ‘옥석 가리기’가 본격화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번 주 시장에서 가장 두드러진 움직임은 달러 강세다. 주요 6개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는 이번 주 들어 1.5% 급등했다. 주목할 점은 시장 불안 시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이던 스위스프랑과 일본 엔화 대비로도 달러가 올랐다는 것이다. 이는 지난해 4월 관세 갈등 여파로 증시가 급락했을 당시 달러가 오히려 약세를 보이며 안전자산 지위에 의문이 제기됐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다만 수요가 몰린 것은 주로 단기 현금성 달러 자산이라는 점에서 한계도 있다. 미국이 에너지 순수출국이라는 구조적 요인도 달러 강세를 뒷받침하고 있다. 중동 긴장으로 브렌트유 가격이 배럴당 80달러를 넘어설 경우, 미국 경제에는 상대적으로 유리한 환경이 조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모건스탠리 외환전략 책임자 제임스 로드는 “달러는 일정 부분 안전자산 성격을 갖지만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며 “미국 정책 불확실성이 커지면 그 만큼 안전자산 매력도 약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국채는 이번 지정학적 충격 속에서도 기대만큼 안전자산 수요를 끌어들이지 못하고 있다. 투자자들이 채권을 위기 대비 자산이 아닌 인플레이션 전망의 함수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부채 규제 완화 등 재정정책의 방향 전환과 각국 정부의 차입 확대 우려까지 더해지면서 채권 시장의 불안은 한층 깊어졌다. 실제로 유로존 기준지수인 독일 10년물 국채 금리는 이번 주 들어 14bp나 상승(가격 하락)했다. 채권이 ‘위기의 방파제’ 역할을 하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반면 금은 여전히 대표적인 안전자산으로서의 위상을 굳건히 유지하고 있다. 금 가격은 단기적으로 변동성을 보이기도 했지만, 2020년 이후 약 240% 상승하며 다른 자산군을 압도하는 장기 강세 흐름을 이어왔다. 일부 투자자들이 중동 갈등으로 인한 다른 자산 손실을 메우기 위해 금을 매도하면서 일시적 하락이 나타났지만, 이는 오히려 저가 매수의 기회로 해석되기도 한다.
인플레이션 우려와 지정학적 긴장, 글로벌 부채 급증 등 구조적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는 점도 금 수요를 지지하는 핵심 요인이다. 미국 자산운용사 스테이트스트리트에 따르면 금 ETF가 글로벌 펀드 자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아직 1% 미만으로, 전략적 적정 비중으로 제시되는 5~10%에 크게 못 미친다. 스테이트스트리트 금 전략 책임자 아카시 도시는 “올해 금 가격은 4000달러보다 6000달러에 가까울 가능성이 높다”고 단언했다.
전통적인 안전통화로 꼽히는 스위스프랑과 일본 엔화는 이번 주 각각 1.2%, 0.8% 하락하며 기대를 밑돌았다. 다만 전문가들은 밸류에이션 측면에서 일본 엔화가 여전히 방어적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스위스프랑은 스위스 중앙은행이 과도한 통화 강세를 억제하기 위해 언제든 시장에 개입할 수 있다는 점이 상승 여력을 제한하는 구조적 약점으로 지목된다.
주식시장의 방어주도 기대에 미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미국에서 유틸리티와 필수소비재 업종이 이번 주 각각 1%, 2.8% 하락했고, 유럽 역시 같은 업종들이 전체 지수 대비 더 큰 낙폭을 기록했다. 이미 고평가 논란이 제기될 만큼 주가가 올라 있던 터라, 위기 국면에서 되레 매도 압력이 집중된 것이다.
결국 시장은 하나의 절대적인 안전자산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냉정한 현실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위기의 성격과 국면에 따라 자산별 역할이 달라지는 만큼, 투자자들은 달러와 금, 일부 통화를 조합해 위험을 분산하는 ‘포트폴리오 안전망’ 전략으로 대응하고 있다.
이주영 기자 123@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