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산책
‘돌봄의 메타인지’가 필요한 시대
얼마 전 우리나라 최고 IT 기업을 방문했다. ‘로봇 친화형’ 건축물로 인증받은 이곳에서, 우리 일행이 만난 로봇은 건물 내 카페에서 일하고 있었다. 혼자 직원 출입 검색대를 통과하고 엘리베이터도 타는 게 신통했다.
이들이 최적의 경로로 이동하게끔 천장 곳곳에 QR코드가 달렸다. 인간에게 커피와 행복을 배달하다가 힘이 딸린 로봇은 스스로 충전 스테이션으로 돌아온다. 우리 일행도 회의실에 앉아 커피를 가져올 로봇을 기대했지만 마침 모두 충전 중이었다. 쉬는 로봇 대신 인간들이 가져와 마실 수밖에.
‘인간 친화형’ 인증이 있다면 여긴 그것마저 받을 수 있겠다 싶었다. 보안 게이트 대신 바깥세상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진 탁 트인 1층 공간, 시민들에게 공개된 인스타그래머블한 도서관, 기념일을 잊고 빈손으로 퇴근해 버리고도 남을 개발자 직원들의 가정 내 평화를 위한 듯한 꽃집 ‘플랜트(Plant)’, 병원 검진 결과를 함께 해석하고 ‘그래서 무엇’을 하면 건강하게 살 것인지 상담해 준다는 의원 ‘케어(Care)’가 있다.
무엇보다 숨을 잘 쉴 수 있게 어디든 설계된 벽과 바닥, 필자 같은 방향치가 길을 잃지 않게 돕는 직관적 표지판이 마음에 쏙 들었다.
이쯤 되니 한 일행이 감탄한다. “우와! 대기업은 다르구나!” 사실 더 큰 기업에 다니는 이 친구에게 우리는 “누가 들으면 프리랜서인 줄 알겠어”라며 웃었다. 인간 친화적 설계를 모든 대기업이 하진 않을 거다. 사람이나 로봇, 환경을 고려한 설계는 예산과 함께 굳은 마음도 있어야 완성될테니.
집중력 외부에 집중하면 내부에 빈 곳도
로봇과 건물 디자인을 보며 돌봄에 대해 생각했다. 에너지가 일정 수준 이하로 낮아져도 충전 스테이션으로 향하지 못했던 필자. 그 결과가 육아의 고단함에서 벗어나 숨을 돌릴만할 때 찾아온 병일 거다. 게다가 다 끝난 줄 알았던 기저귀 갈기와 이유식, 목욕시키기가 다시 내몫으로 돌아왔다. 부모님을 위한 새로운 버전으로.
지난 시절 나를 돌아보니 끼니를 대충 때우거나 건너뛴 적이 많았다. 공부와 육아, 일을 동시에 하는 동안 정작 나를 돌보는 생활 기술엔 문맹이었다. 왜 우리는 다른 일엔 능숙해도 자기 자신을 돌보는 일에는 무능할까? 오랫동안 타인에 맞춰 작동한 뇌는, 돌봄이 끝난 뒤 그 에너지가 자기를 향해 자동으로 흐르진 않나 보다. 혹시 타인 돌봄과 자기 돌봄이 스위치처럼 작동해 한쪽이 켜지면 다른 쪽이 꺼지는 건 아닐까?
이 상상이 전혀 엉뚱하지 않다는 걸 최근 연구결과가 말해준다. 집중력을 외부 세상을 향한 감각에 모두 쏟다 보면 자기 몸 안의 감각을 살피는 내부수용감각에 쓸 인지 자원이 모자랄 수 있다. 또 만성스트레스는 ‘안을 향한 안테나’의 감도를 둔하게 하고, 전전두피질의 실행 기능을 약화한다. 허기와 피로, 심박, 호흡 등 몸 안에서 일어나는 신호가 “스테이션으로 돌아가!”라고 외쳐도 그걸 읽어내지 못하고, 멈추고 돌아갈 행동도 둔해진 것.
돌봄의 동료들! 내부신호에 둔감해진 자신을 탓하지 말자. ‘인간 친화형’ 건물처럼 설계된 사회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클라우디아 골딘(Claudia Goldin) 하버드대 교수가 말한 끝없는 대기 상태를 유지해야 할 탐욕스러운 일자리와 제도 사이에 우리가 끼어있었던 탓에, 자기 돌봄의 인지적 자원을 잃은 건 당연할지도 모른다.
비혼 혹은 커리어 포기를 이유로 다른 형제들을 대신해 부모 돌봄을 맡은 여러분도 마찬가지다. 자기 돌봄의 붕괴는 개인의 실패가 아닌, 그 구조에 끼인 사람의 생존반응일지도 모른다. 여러분은, 가족 관계에서 비롯된 만성 부담이 인간의 노화 속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는 최근 연구 결과를 굳이 확인하지 않더라도 이미 몸으로 알고 있다.
디지털 연결에서 한 발 떨어져 보기
기억하자. 이런 현실의 거칠고 불편한 인간관계를 피해, 아첨하는 AI와 달콤한 알고리즘만 존재하는 매끄러운 디지털 세상은 충전 스테이션이 아니다. 그곳에서 함께 있어도 우리는 더 외로워질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돌봄의 메타인지’다. 내 몸에 집중해 안에서 들리는 신호를 주기적으로 읽어내야 하고, 멈추고 돌아오는 로봇처럼 자신에게 돌아오는 연습이다. 목소리를 내는 일엔 멈추지 말자.
로봇 친화형 건물을 위해 충전 스테이션을 설계하고 QR 코드를 천장에 달아둔 것처럼, 우리 사회도 그렇게 설계해야 한다. 플랜트와 케어가 있는 사회 설계를 요구하자. 또, 디지털 연결을 한 발 떨어져 바라보는 능력도 필요하다. 나와 사회, 디지털 세상을 인지하고 행동하는 메타인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