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종 칼럼
반도체 초호황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다
인공지능(AI) 혁명이 촉발한 메모리 반도체 초호황에 나라가 붕 떠 있는 것 같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두 회사가 반도체 사업에서 올해 벌어들일 영업이익이 500조원을 넘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두 회사 총수는 물론이고, 대통령이 비행기를 타고 해외에 나갈 때마다 각국의 투자 구애와 극진한 예우가 쏟아지니 정권 주변은 기세등등하다.
이 눈부신 영광의 풍경을 지켜보면서 1994년 11월 실리콘밸리에서 인텔의 전설적인 CEO 앤디 그로브를 인터뷰했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당시 인텔은 펜티엄 초기 리콜 사태의 홍역을 치르면서도 PC 시대를 지배하는 난공불락의 반도체 강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해 인텔의 매출액 규모는 114억달러였고, 삼성전자는 반도체 매출액 약 30억달러로 일본의 기라성같은 메모리칩 강자를 헤치며 고개를 내밀 때였다. 인터뷰 전 만난 비서실 엔지니어는 “인텔의 프로세서 칩은 인간의 머릿속 뇌와 같고, 삼성의 메모리 칩은 가방에 넣고 다니는 메모책과 같다”며 기술 선두주자의 오만한 자부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앤디 그로브의 시선은 부하 직원들과 달랐다. 그는 삼성전자의 무서운 힘을 ‘파이낸싱(돈줄)’이라 규정했다. 삼성전자가 어려울 때 그룹이 받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면 국가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한국형 기업생태’의 막강한 자본 동원력을 정확히 꿰뚫으며 경계하고 있었다. 나아가 그는 창밖의 실리콘밸리 빌딩들을 가리키며 “저곳에는 인텔이 언제 망할지 기다리는 경쟁자가 득실거린다. 이 실리콘밸리에서는 정부도 우리를 돕지 않는다”며 지독한 편집증적 위기의식을 터뜨렸다.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는 반도체 전장
30여 년이 지난 오늘 크리스 밀러의 저서 ‘칩워(Chip War)’가 말해주듯 반도체는 21세기 국가 안보와 생존을 좌우하는 절대적 ‘전략 물자’가 되었다. 하지만 70년 반도체 역사가 보여주듯 이 전장에선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다. 반도체의 고향인 미국에서 1980년대 초반 인텔은 일본 반도체 기업의 저가 공세와 일본정부의 지원에 밀려 메모리칩을 포기하는 위기를 맞은 적이 있다.
이 여세를 몰아 메모리 강자가 된 일본은 1989년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을 외치며 미국에 도전하다가 미국의 거센 보복과 반격을 자초했다.
메모리를 포기한 인텔은 로직칩에 집중하며 PC 혁명을 타고 20여년 동안 대체불가한 반도체 왕좌의 자리를 누렸다. 그러나 인텔 역시 오만에 빠져 21세기 스마트폰과 AI 시대의 흐름을 냉혹하게 읽지 못했다. 스티브 잡스의 아이폰 칩 공급 요청을 수익성이 낮다는 이유로 거절했고, 젠슨황의 엔비디아를 M&A하려다 기술순혈주의에 빠진 이사회의 반대로 무산된 후 내리막길을 걸었다. 반면 1993년 창업한 젠슨황의 스타트업 엔비디아는 30년 만에 세계 최대 기업의 반열에 올랐다.
오늘날 세계 반도체 무대는 미국 한국 중국 대만 일본 등 5개국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인공지능 특수에 업힌 한국의 천문학적 영업이익을 근거로, 정권 주변에서는 GDP 3~4위 도약을 입에 담을 정도로 장기 호황을 당연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화려한 샴페인 뒤편의 진실을 냉정하게 직시해야 한다. 미국은 과거의 방임주의를 버리고 국가 자본주의적 방식을 모방해, 아시아에 의존하던 첨단제품 공급망을 자국으로 리쇼어링하고 있다. 나아가 파산 위기에 처한 인텔을 살리기 위해 정부 지분을 직접 투입하고 엔비디아 구글 등 자국 빅테크 기업들까지 총동원해 소생 작업을 벌이는 중이다.
이처럼 거대한 지정학적 불안정성 속에서, 거두어들이는 막대한 국부는 결코 단순한 경제적 성취 이상의 무거운 과제를 던져준다. 만약 이 천문학적인 자금 유입을 장기적인 경기호황으로 오인해 미래를 위한 기술투자와 구조개혁을 게을리한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거대한 재앙의 서막이 될 수 있다.
역사를 돌아보면 한때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을 부르짖으며 세계를 호령할 수 있다고 믿었던 소니의 모리타 아키오 회장과 보수논객이자 소설가 이시하라 신타로의 기세와 자만도 결국 미국의 총체적이고 냉혹한 지정학적 견제 앞에 처참하게 꺾이고 말았다. 반도체 패권의 흥망성쇠는 단순히 기업의 기술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국부를 미래 경쟁력으로 바꿔야
결국 반도체 전쟁의 본질은 일시적인 수치(數値)나 쏟아지는 박수에 취해 있을 문제가 아니다. 메모리 호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밀려드는 막대한 국부를 안일하게 소비하거나 방만하게 흩뿌릴 때가 아니다.
오만함이 나라를 삼키고 거인을 무너뜨렸던 수많은 역사를 거울삼아 반도체 기업 총수와 국가정책 입안자 및 결정권자들은 30여년 전 인텔 CEO가 실리콘밸리의 창밖을 응시하며 품었던 그 냉혹한 편집증적 위기의식에서 교훈을 얻어야 할 때가 아닐까.
전 한국일보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