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지방정부 평가기준을 바꿔야 할 이유

2026-07-27 13:00:01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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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이면 민선 지방자치가 출범한 지 32년이 된다. 그동안 지방정부를 평가하는 대표 잣대는 공약 이행률이었다. 선거 때 약속한 사업을 얼마나 추진했고 얼마나 완료했는지가 단체장의 성적표가 됐다. 그러면 공약을 많이 지킨 지방정부가 반드시 좋은 지방정부일까.

공약은 행정의 출발점일 뿐 목적은 아니다. 시민이 지방정부에 기대하는 것은 단순히 공약을 많이 이행하는 행정이 아니라 나의 삶을 바꾸는 행정이다. 이제 지방정부를 평가하는 기준도 공약의 개수가 아니라 시대가 요구하는 핵심 문제를 얼마나 해결했는지로 옮겨갈 때가 됐다.

세상은 지금 엄청난 속도로 변해가고 있다. 인공지능(AI)이 산업지형을 바꾸고 반도체는 국가 경쟁력을 좌우한다. 저출생과 지역소멸, 초고령사회, 기후위기는 지방정부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현실이 됐다. 최근엔 취임 이후 단체장이 스스로 공약을 수정하거나 우선순위를 바꾸는 일도 드물지 않다. 현실을 외면한 채 선거 당시 약속만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이 반드시 책임 있는 행정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사업 갯수보다 삶의 변화가 핵심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한다. “공약을 얼마나 지켰는가”가 아니라 “우리 지역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무엇으로 규정했고 그것을 얼마나 해결했는가”가 지방정부 평가의 새로운 기준이 되어야 한다. 평가기준이 달라지면 행정이 달라진다. 마치 입시(선발 기준)가 바뀌면 학교 교육이 바뀌고 학교가 바뀌면 학생들의 공부 방식이 달라지는 것과 같다. 최근 반도체와 AI 산업의 성장으로 의대 일변도의 최상위권 진학 흐름에 변화 바람이 부는 것 역시 사회가 바뀌고 요구하는 기준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지방행정도 마찬가지다. 공약 이행률을 평가하면 지방정부는 공약을 많이 만들고 많이 완료하는 데 집중한다. 그러나 문제해결 능력을 평가하면 예산과 조직, 인사와 정책은 자연스럽게 시민이 체감하는 성과, 시민 삶을 바꾸는 일에 집중하게 된다.

현실은 이미 이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용인시는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과 삼성전자 투자로 도시의 미래를 다시 설계하고 있다. 경기 이천시와 충북 청주시는 SK하이닉스와 함께 성장하며 법인지방소득세 증가와 재정 기반 확대라는 성과를 만들어냈다. 기업 유치는 단순한 투자 실적이 아니다. 지방세를 늘리고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며 청년을 붙잡고 지역경제를 살리는 출발점이다. 앞으로 지방정부 경쟁력은 얼마나 많은 사업을 했느냐보다 얼마나 좋은 기업을 유치하고 지속가능한 성장기반을 만들었느냐로 갈릴 가능성이 크다.

출산율도 마찬가지다. 출산지원금을 얼마 지급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 아이를 낳고 키우기 좋은 도시가 됐는지를 봐야 한다. 청년이 지역에 남았는지, 돌봄 공백이 줄었는지, 출퇴근 시간이 단축됐는지, 빈집은 감소했는지, 생활인구는 늘었는지가 시민이 체감하는 진짜 성과다. 행정이 사업(Input)이나 집행(Output)이 아니라 주민 삶의 변화(Outcome)로 평가받아야 하는 이유다.

세계 주요국들의 정부 및 지방행정은 이미 방향을 틀었다. 뉴질랜드는 2019년부터 경제성장 중심이 아니라 국민 삶의 질과 정신건강, 아동빈곤 등을 중심으로 국가예산을 편성하는 ‘웰빙 예산’을 도입했다. 핀란드는 부처가 아니라 사회문제를 중심으로 정책을 설계하는 ‘현상 중심 행정’을 실험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금(OECD) 역시 개별 사업보다 사회문제 해결 성과를 중심으로 행정을 평가해야 한다고 지속적으로 제안하고 있다.

민선 9기 성적표, 공약 완료율 아닌 문제 해결력이어야

우리 지방정부도 이제 핵심 역할을 바꿔야 한다. 공약 몇개를 완료했는지가 아니라 청년 유출을 얼마나 줄였는지, 기업을 얼마나 유치했는지, 지역경제를 얼마나 살렸는지, 시민의 삶을 얼마나 개선했는지가 단체장의 성적표가 되어야 한다. 100가지 사업을 찔끔찔끔 개선하는 행정보다 5가지 핵심 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하는 행정이 시민 삶의 변화에 기여할 수 있다.

민선 9기는 지난 성과에 대한 평가를 기반으로 지방자치의 다가올 30년을 준비해야 할 시기다. 앞으로 지방정부가 경쟁해야 할 것은 공약 이행률도, 사업의 종류나 갯수도 아니다. 누가 시대가 요구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를 짚어내고 시민과 함께 해결했는지. 민선 9기 지방정부의 출발은 이 질문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제형 자치행정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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