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산책

적단풍 - 지구식물로 사는 또 하나의 방식

2026-05-26 13:00:02 게재

상엽홍어이월화(霜葉紅於二月花). 서리 맞은 단풍이 이월의 꽃보다 더 붉다는 뜻이다. 본격적인 여름도 오지 않았는데 생뚱맞게 늦가을을 소환하는 까닭은 적단풍이 초여름의 푸르름 속에서 단연 붉게 도드라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월화는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홍매화를 꼽았지만 필자는 동백을 떠올렸다.

꽃은 붉은 것이 드물지 않지만 가을이 아니라면 붉은 잎은 드물다. 한데 몰 밀어 적단풍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이들 잎의 색은 무척 다양하다. 붉고 푸른 잎이 한 가지에 두 갈래로 갈라지는가 하면, 붉은 색조가 있더라도 푸른빛이 농담을 달리하는 잎 등 천차만별이다. 게다가 햇빛 내리비치는 수관의 가지 끝에선 붉은 잎이 선명한 자태를 뽐낸다.

잎의 색은 주로 세가지 화합물이 결정한다. 광합성 공장인 엽록소는 푸른색이고 광합성 보조색소이자 가을 은행잎에 듬뿍 든 카로티노이드는 노란색이다. 붉은색은 안토시아닌에서 비롯된다. 주로 이 세가지 화학물질의 비율에 따라 나뭇잎이 다양한 색깔을 띠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적단풍 붉은 잎이라 해도 그 안에는 엽록소가 들어있다. 여름이면 그들도 깜냥껏 바지런히 광합성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큰 나무 아래 그늘진 곳에 터를 잡은 적단풍 잎은 탁한 갈색으로 보인다. 빛을 더 많이 받으려 엽록소를 더 많이 만들기 때문이다. 푸른빛의 엽록소가 안토시아닌의 붉은빛과 섞여 탁한 색조가 세진 것이다. 따라서 적단풍 잎이 푸를수록 안토시아닌보다 엽록소가 더 많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적단풍이 봄부터 붉은 색을 띄는 이유

나무 대부분은 성하(盛夏)의 강한 빛을 푸른 엽록소로 맞선다. 그러나 가을이면 노랗고 붉게 잎을 물들인다. 그 가운데서도 단풍나무는 가을 단풍의 군계일학이다. 여름날 태양에서 날아오는 빛알(photon)을 잡아 광합성을 하던 엽록소가 한해의 소임을 마칠 즈음이 되면 식물은 엽록소를 분해해 그 안에 든 귀중한 원소를 알뜰히 거둬들인다.

중국 난징대학 연구진은 3년 동안 단풍나무의 잎을 관찰한 뒤 엽록소가 분해되는 과정을 분석했다. 아침저녁으로 기온이 떨어지는 시절이 오면 엽록소의 양이 20~30일에 걸쳐 서서히 줄어든다. 그다음 한 20일에 걸쳐 안토시아닌의 양이 빠르게 늘어나 정점에 이른 연후에 나머지 엽록소가 다시 분해되기 시작했다. 안토시아닌이 충분히 준비된 연후에야 나무가 최종 작업을 갈무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늦가을 안토시아닌이 하는 일은 무얼까?

짐작하다시피 광합성은 빛과 화학으로 구성된다. 효소가 관여하는 화학적 과정은 온도에 민감하지만 빛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조석으로 쌀쌀한 가을, 식물에는 대낮의 강한 빛에 대응할 장치가 필요하다. 과학자들은 안토시아닌이 자외선 차단 기능이 있어 식물을 보호하리라 생각한다. 항산화 기능을 언급하기도 하고 최근에는 밝은색을 싫어하는 초식곤충을 노려 화려한 색소를 만든다는 가설도 등장했다. 아마 전부 맞지는 않을 것이다. 갖은 환경에 맞서 식물이 자신의 영토를 성공적으로 넓혀 온 지구 역사를 살펴보면 말이다.

적단풍은 왜 시작부터 안토시아닌 색소를 마련했을까? 빛알을 두고 안토시아닌과 엽록소가 경쟁하면 광합성 비용이 늘어날 것이 뻔하므로 이 색소가 지닌 진화적 이점이 없었다면 이런 불리한 형질을 굳이 선택했을 리 없다.

빛을 받아들이는 장치가 광합성 화학보다 먼저 발달하기에 이른 봄에 여린 잎이 붉은색조를 띠면 자외선의 폐해로부터 먼저 보호받을 수 있다. 나쁘지 않다. 배고픈 초식동물이 연두색 잎을 찾아 배를 채우려 할 때 적단풍의 어린 붉은 잎이 일종의 보호장치가 되었을 수도 있다. 초식동물의 뇌가 먹을 수 있는 잎의 색상을 연두색으로 고정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견 우리 눈에 불리해 보이는 전략이 발달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서둘러 우듬지를 키워 햇볕을 향해 무한경쟁을 하느니 그늘에서 천천히 자라며 미래를 모색하는 것도 그리 나쁜 전략은 아니다.

일견 불리해 보이는 전략도 나름 이유 있어

인간 세계에서도 적단풍과 비슷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적녹색약이 그것이다. 망막 원추세포에 문제가 생겨 빨간색과 초록색의 미묘한 차이를 구분하기 어려운 질환이지만 살아가는 데 큰 지장은 없다고 한다. 사실 빨강과 초록을 구분하는 능력은 옛날 우리 조상이 나무에 살며 영양소가 높은 무르익은 과일을 고르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온통 초록인 숲속 세상에서 적녹색약인 사람이 삼색각을 가진 ‘정상인’보다 물체의 공간 지각력이 훨씬 좋다고 한다. 다시 말해 나무 뒤에 은신하고 있는 포식자나 피식자가 훨씬 눈에 잘 뜨인다는 뜻이다. 살아있는 것은 누구든 제 곬으로 뛰어나다.

김홍표 아주대학교 약학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