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출산시대 가임력 지원
“아이를 낳을 자유만큼 준비할 자유도 필요하다”
가임력 보존 제도 확산 속 출산 가능성 높이는 정책 필요
저출산이 사회적 위기로 떠오르면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가임력 지원 정책도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난임치료 중심이었다면 최근에는 임신 이전 단계에서 자신의 생식 건강을 점검하고 미래의 출산 가능성을 보존하는 ‘가임력 보존’ 정책으로 영역이 넓어지는 분위기다. 한국오가논이 최근 발행한 여성매거진에 게재된 생식의학 전문가인 김지향 차여성의학연구소 분당 난임센터 소장과 실제 난자 동결을 경험한 박효원 씨의 인터뷰를 통해 국내 가임력 보존 정책의 현주소와 과제를 짚어봤다.
“가임력 보존은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앞에서 미래의 선택권을 지키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26일 한국오가논에 따르면 20여 년간 난임 치료와 가임력 보존 연구에 매진해 온 김지향 차 여성의학연구소 분당 난임센터 소장은 최근 진료 현장에서 뚜렷한 변화를 체감하고 있다. 과거에는 난임 진단 이후 병원을 찾는 환자가 대부분이었다면, 이제는 미혼 여성이나 젊은 직장인들이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난자 동결 상담을 받으러 온다는 것이다.
실제 차병원 데이터에 따르면 미혼 여성의 난자 동결 시술 건수는 2015년 72건에서 2022년 1400건으로 급증했다. 김 소장은 “정책 지원 확대와 유명인들의 경험 공개가 심리적 장벽을 낮춘 측면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특히 난자 동결 기술 자체가 크게 발전했다고 강조했다. 과거의 슬로우 프리징 방식은 난자 내부에 얼음 결정이 생겨 세포 손상 위험이 컸지만, 현재는 급속 유리화 기술 덕분에 해동 후 난자 생존율이 크게 개선됐다는 설명이다.
김 소장은 “난자 동결은 현재의 가임력을 미래로 이동시키는 개념”이라고 설명한다. 예컨대 28세에 동결한 난자를 40세에 사용하면 ‘28세의 난자 나이’로 임신을 시도하는 셈이라는 것이다. 김 소장은 “가장 효과적인 시기는 20대 중후반에서 30대 초반”이라며 “임신 성공률을 좌우하는 것은 자궁보다 난자의 나이”라고 강조했다.
◆가임력 보존, 미래 설계를 위한 선택지 = 정부 역시 이러한 흐름에 맞춰 가임력 지원 정책을 확대하고 있다. 현재 보건복지부와 각 지자체는 ‘임신 사전건강관리 지원사업’을 통해 20~49세 남녀를 대상으로 △난소기능검사(AMH) △부인과 초음파 △정액검사 비용 등을 지원하고 있다. 생애주기별 1회씩 최대 3회까지 지원 가능하며 여성은 최대 13만원, 남성은 최대 5만원의 검사비를 받을 수 있다.
서울시의 경우 한발 더 나아가 ‘난자 동결 시술비 지원사업’을 운영 중이다. 난소기능수치(AMH) 1.5ng/ml 이하이면서 중위소득 180% 이하인 20~49세 여성에게 난자 채취를 위한 검사비와 시술비의 50%, 최대 200만원까지 지원한다.
그러나 실제 현장에서 체감하는 비용 부담은 여전히 크다. 난자 동결 경험자인 박효원 씨는 “2차 시술까지 약 550만원이 들었다”며 “서울시 지원으로 부담을 덜긴 했지만 추가 시술에는 지원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박씨가 난자 동결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예상보다 빠른 난소 기능 저하였다. 그는 집에서 AMH 자가진단키트로 검사를 했다가 자신의 난소 나이가 실제 나이보다 훨씬 높게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회상했다.
“내가 생각해 온 미래가 갑자기 닫히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확 올라왔어요.”
20대에 자궁과 난소 물혹 수술 경험이 있었던 그는 이후 병원 상담을 거쳐 난자 동결을 결심했다.
박씨는 무엇보다 정보 부족이 가장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정부나 병원 홈페이지 대부분이 기혼 난임부부 중심으로 설계돼 있어 미혼 여성 입장에서는 지원 절차나 시술 과정을 이해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블로그와 유튜브를 통해 정보를 찾아야 했다.
그는 “가임력 보존을 미래 설계를 위한 선택지로 인정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핵심은 “미리 알고, 미리 관리할 수 있는 환경”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서울시여성가족재단 조사에 따르면 서울시 20~49세 여성의 51.4%가 난자 동결을 고려해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고려 이유로는 ‘원하는 시기 출산 대비’가 44.8%로 가장 많았고, ‘현재 계획은 없지만 생각이 바뀔 수 있어서’라는 응답도 26.8%에 달했다.
◆난임 이전 단계에서 관리해야 = 다만 정책적 한계도 분명하다. 현재 난임 부부는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만, 미혼 여성의 난자 동결은 상당 부분 비급여다. 박씨는 “난자 채취 과정은 시험관 시술과 거의 동일한데 지원 체계는 다르다”며 “출산 의지가 있는 사람일수록 더 큰 비용을 먼저 감당할 수도 있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김 소장 역시 비용 문제가 가장 큰 장벽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난자 채취와 보관 비용까지 포함하면 수백만 원이 들고 추가 시술이 필요한 경우도 많다”며 “20~30대 초반은 가장 적절한 시기이지만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않은 세대”라고 말했다.
김 소장은 국가 차원의 공공 난자은행 시스템 구축도 제안했다. 사용되지 않은 동결 난자를 공공 시스템 안에서 기증·활용하는 구조를 만든다면 비용 대비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해외 사례도 변화의 방향성을 보여준다. 싱가포르는 의학적 난자 동결과 보조생식술에 보험 지원을 제공한다. 대만은 미혼 여성과 동성 커플의 체외수정 및 난자 동결 허용 확대를 검토 중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가임력은 난임 이전 단계에서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 소장은 청소년기부터 생식 건강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박씨는 가임력 검사를 국가건강검진 항목에 포함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또 다른 공통점은 ‘정서적 지원’에 대한 요구다. 난임 치료 과정에서 상당수 환자가 우울감과 공황장애를 겪고 있지만, 사회는 여전히 이를 개인 문제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김 소장은 “난임 휴가를 눈치 보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직장 문화와 출산 이후 돌봄 시스템까지 함께 가야 한다”고 말했다.
박씨 역시 “난자 동결은 미래를 준비하는 일인데도 개인 연차로 처리되는 경우가 많다”며 기업 차원의 유급휴가와 복지 확대 필요성을 강조했다.
결국 이들은 가임력 보존은 단순히 출산을 장려하기 위한 기술이 아니라, 각자의 삶의 시간표를 스스로 설계할 수 있도록 돕는 사회적 안전망을 강조한다.
박씨는 “가임력 보존은 나의 시간과 삶을 스스로 설계하는 하나의 선택지”라며 “‘나 난자 동결했어’라고 편히 말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와 제도적 지원이 뒷받침되면 좋겠다. 나 역시 그 선택지 덕분에 미래가 조금 덜 두려워졌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김규철 기자 gckim1026@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