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일본'인플레이션세'의 시사점
물가상승이 장기화되면서 일본 국민들의 생활 부담이 커지고 있다. 반면 일본 정부의 2025년도 세수는 처음으로 80조엔을 넘어 과거 최고 수준을 경신할 것으로 예상된다. 세수증가의 배경에는 임금인상과 주가상승에 따른 소득세 수입 증가, 물가상승에 따른 소비세 수입 증가 등이 있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일본에서 ‘인플레이션세’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플레이션세란 물가상승으로 돈의 실질가치가 하락해 가계의 예금이나 소득의 구매력이 줄어드는 한편, 정부 부채의 실질부담은 낮아지는 현상을 말한다. 일반적인 세금은 정부가 세제를 개정하고 국회에서 논의하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국민도 부담의 내용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보이지 않는 증세'로 불리는 인플레이션세
인플레이션세는 납세고지서가 발송되는 것도 아니고, 세율이 명확히 표시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물가상승을 통해 가계의 구매력은 줄어들고, 그 일부는 정부 부채의 실질적 축소로 이어진다. 이 때문에 인플레이션세는 ‘보이지 않는 증세’ 또는 ‘스텔스 증세’라고 불린다.
예를 들어 100만엔의 예금을 가진 경우를 생각해 보자. 물가가 오르지 않는다면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상품과 서비스의 양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물가가 1.5배로 오르면 같은 100만엔으로 구입할 수 있는 양은 줄어든다. 명목상 예금액은 그대로지만 실질가치는 하락한 것이다.
이 관계를 국가 전체에 적용하면 최대 채무자는 정부이고 최대 채권자는 국민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정부는 막대한 공적부채를 안고 있으며, 국민은 예금 보험 연금자산 등을 통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국채를 지탱한다. 물가가 상승하면 정부 부채의 실질가치는 낮아지지만 동시에 가계가 보유한 현금과 예금의 실질가치도 하락한다. 결과적으로 가계에서 정부로 소득이 이전되는 구조가 형성된다. 이것이 인플레이션세의 본질이다.
최근 일본에서 이 문제가 더욱 심각하게 인식되는 배경에는 엔화약세와 수입물가 상승이 있다. 일본은 에너지 식료품 원자재의 상당 부분을 해외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엔화약세가 진행되면 수입가격이 상승하고, 이것이 국내 물가로 전가되기 쉽다. 휘발유 전기요금 식품가격 등 생활필수품 가격이 오르면 가계는 절약을 강요받는다.
또 하나의 문제는 소득세 제도에서 발생하는 ‘브래킷 크리프’이다. 브래킷 크리프는 물가상승으로 인한 명목소득의 증가로 납세자의 소득이 보다 높은 세율이 적용되는 소득구간으로 밀려 올라가 실질적인 증세가 일어나는 현상을 말한다. 이는 명목임금 상승에 따른 실질적인 증세이며 스텔스 증세의 대표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인플레이션세는 특히 역진적인 성격을 가진다. 부유층은 주식 부동산 외화자산 등 인플레이션에 비교적 강한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반면 저소득층이나 고령자의 상당수는 현금 예금 연금 등에 의존한다. 물가상승이 진행되면 이들의 생활은 직접적으로 압박을 받는다.
물가상승 시대에 맞는 조세·재정 제도 설계를
향후 저금리와 엔저를 지향하며 현재의 금융·재정정책을 지속하려는 다카이치 정권이 인플레이션세 문제에 어떻게 대응할지 주목된다. 밀턴 프리드먼이 “인플레이션은 입법 없이 부과되는 세금”이라고 말했듯이 인플레이션세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국민의 실질 구매력을 조금씩 약화시킨다.
따라서 정부는 세수증가라는 결과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그 증가가 누구의 부담 위에서 이루어졌는지를 명확히 설명해야 한다. 한국 역시 일본의 사례를 참고해 보이지 않는 증세를 방치하지 않고, 투명한 논의와 공정한 제도 설계를 통해 물가상승 시대에 맞는 조세·재정 운영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