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 지능으로 안전 선진화

안전규정, 현장 안전을 신세계로 이끌 악보

2026-05-29 13:00:38 게재

창밖으로 싱그러운 초록이 만개한 ‘계절의 여왕’ 5월이다. 눈부신 봄날의 풍경을 스치며 운전하던 중, 라디오에서 웅장하고 역동적인 선율이 흘러나왔다. 드보르작의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 4악장이었다.

현악기와 금관악기들이 거침없이 질주하며 뿜어내는 강렬한 도입부를 지나, 이내 잔잔하고 서정적인 클라리넷의 독주로 이어지는 선율을 듣던 중 ‘잘 짜인 기업의 안전 규정은 그 자체로 거칠고 위험한 산업 현장을 안전이라는 신세계로 이끌어갈 정교한 악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케스트라 악보의 의미

오케스트라 악보는 그 장엄한 하모니를 시각화한 최고 수준의 시스템 소프트웨어라 할 수 있다. 수십개의 서로 다른 음색을 가진 악기들과 저마다의 기량과 개성을 지닌 단원들 100여명이 환상의 하모니를 낼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지휘자의 압도적인 카리스마 이전에, 모든 선율과 리듬이 시간과 공간의 축 위에서 완벽하게 정렬된 ‘총보(Full Score)’와 ‘파트보(Part Score)’라는 구조화된 메커니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악보가 없다면, 거친 신세계의 에너지는 그저 귀를 찢는 소음(Noise)과 통제 불능의 혼돈으로 전락했을 것이다. 산업 현장의 지침도 이와 같다. 매일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생산의 역동적 에너지는 ‘사규’ 시스템이 만든 ‘작업절차서(SOP)’라는 정교한 악보를 거칠 때 비로소 안전한 생산의 하모니가 된다.

안전 사규와 교향 악보

현대 시스템 안전공학의 거장 옌스 라스무센(Jens Rasmussen)이 복잡다단한 생산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제어하기 위해 제시한 ‘추상화 위계(Abstraction Hierarchy)’ 5단계 구조는 대형 생산 현장은 물론 교향곡의 악보 체계와도 잘 들어맞는다.

최상위 기능적 목적(Functional Purpose)은 기업이 지향하는 ‘안전한 생산을 통한 인간 존엄의 가치’로 교향곡이 도달하고자 하는 ‘예술적 감동과 신세계의 비전’과 일치한다.

추상적 기능(Abstract Function)은 현장 시스템 내의 에너지 흐름과 실행 원칙으로 곡의 뼈대를 이루는 ‘화성법과 대위법적 논리’다.

생산 공정과 작업의 제어 루프와 프로세스가 차지하는 일반적 기능(Generalized Function) 단계는 목관 금관 현악 파트가 맺고 있는 ‘파트별 화성적 관계’다.

현장에서 실행될 작업 지침, 즉 현장의 재료 도구와 작업자의 인터페이스 단계인 물리적 기능(Physical Function)은 각 악기가 가진 고유한 음색들의 하모니를 만드는 파트보의 기계적 메커니즘이다. 그리고 최하위 물리적 형태(Physical Form)인 현장의 작업 설비의 형상과 특성은 연주자가 다루는 악기와 무대로 매칭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형 산업 현장의 중대재해 발생 과정에 어김없이 지켜지지 않은 지침들이 발견된다. 구조를 갖추지 못한 사규와 부적절한 유리관리의 결과다.

규정의 개정 이력을 보면 현장의 필요나 논리가 아니라, 법규 개정이나 ISO 45001 같은 인증에 대비하기 위한 ‘땜질’이 대부분이다.

상위의 철학(Why)과 원칙이 하위의 방법(How)을 통제하고, 하위 실행 데이터의 피드백이 상위 규정들을 진화시키는 유기적 구조를 잃어버린 것이다.

일탈을 유인하는 지침의 비만

더 큰 문제는 에릭 홀나겔(Erik Hollnagel)이 주창한 ‘효율성과 완벽성의 절충(ETTO, Efficiency-Thoroughness Trade-Off)’ 원리에서 나타난다. 생산 파트와 현장의 작업자가 한정된 시간 내 목표 달성이라는 효율성과, 현장 안전 지침의 완벽한 준수 사이에 서게 되는 현장 작업자들에게 지침의 비만은 ‘성실한 일탈’의 유인이다.

사규들을 살려야 한다. ‘연계 상호작용 실행’이 톱니바퀴처럼 작동하기 위해 사규들을 구조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 단순한 위반 적발과 ‘감시’에서 벗어나, 현장에서 지침이 생략되거나 우회되는 실질적 이유를 살피는 ‘관찰’로 전환하고 불필요한 사족을 덜어내는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 생산 부서와의 허물없는 소통을 통해 현장의 생생한 정보를 흡수하고 스스로 진화하는 유기체로 재건해야 한다.

이 변화의 물꼬는 규제를 다루는 정부가 열어야 한다. 정책 책임자와 기업 경영자는 지휘대 위에서 교향악단을 살피는 ‘마에스트로’의 깊고 넓은 시선으로 기업의 안전을 짓누르는 낡은 종이 더미를 결자해지해야 한다.

고재철

법무법인 화우 고문

전 안전보건공단

안전보건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