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로

투표용지 부족사태, 차분한 진상규명 후 대책을

2026-06-10 13:00:02 게재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빚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난타당하고 있다.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과 대통령도 질타의 강도가 덜하지 않다. 시민단체와 대학가의 비판도 매섭고 참정권을 침해받았다면서 항의하는 시위는 서울 송파를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연일 계속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8일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모범적인 민주국가 대한민국의 모든 걸 한순간에 깡그리 망가뜨렸다”고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이미 검경합동수사본부를 꾸릴 것을 지시해 놓은 상태이고 이날 오후에는 4부 요인과 만나 선관위 개혁방안을 마련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민주주의 핵심인 선거제도에 대한 심각한 불신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 중앙선관위는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사태 발생의 경위와 근본원인을 규명하기에 앞서 격렬한 분노와 비난이 봇물을 이루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사안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데 부정선거 음모론의 불길을 지피려는 불장난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선거관리위원회 오판이 부른 혼란

이번 사태의 출발점은 지방선거 사전투표율 상승추세를 감안해 본투표용지 인쇄 및 배부 매수를 줄인 것이었다. 지방선거의 경우 사전투표율이 20%를 넘어선 만큼 이를 반영해 본투표용지를 줄이자는 것은 나름 합리적 발상이다. 중앙선관위는 이번 지방선거에 앞서 투표관리운영 개선에 대한 연구용역을 의뢰했는데 사전선거투표율 증가 추세를 감안해 본투표용지 인쇄 매수를 줄이는 방안을 검토할 만하다는 의견을 얻었다.

여기에 더해 부정선거론자들이 사용되지 않은 잔여투표용지 수량이 많은 것은 부정선거에 이용하려는 의도라고 공세를 펴는 것까지 염두에 두고 투표용지 인쇄매수 하한선을 예상투표자의 60% 이상에서 50% 이상으로 낮추는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투표양태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한번 정한 투표용지 인쇄 하한선을 고집한다면 인쇄비용 및 잔여투표용지 폐기 비용 낭비이자 부정선거 이용 의도라는 불필요한 의심을 초래하는 직무유기로 지적받아 마땅하다.

중앙선관위가 본투표용지 인쇄 하한선을 낮출 수 있도록 지침을 내렸다고 해도 시도선관위 또는 시군구 선관위 차원에서 현지 상황을 감안해 본투표용지 수량을 조정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부정선거나 특정 정파에 유불리가 개입될 여지는 거의 없다.

그런데 이번 지방선거의 경우에는 선거실무자들의 예상을 뛰어넘은 투표율 증가로 사달이 났다. 특히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심했던 서울 송파구 잠실 7동을 비롯해 잠실 2동, 잠실 4동, 문정 2동 등은 전체 유권자 대비 본투표 비중이 50%를 넘었다.

부동산, 세금, 유가보조금 지급 문제 등으로 분노지수가 급격히 상승하며 유권자들의 본투표율이 높아질 수 있음을 예상하고 대비해야 했는데 거기까지는 중앙선관위와 시도 및 시군구 선관위 차원의 대처가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이 대통령이 언급한 국민들의 참정권, 주권에 대한 감수성이 둔감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현재까지 투표용지가 부족했던 투표소가 91개소로 집계됐고 이 가운데 26개 투표소에서 투표용지가 떨어져 투표가 중단되었다가 재개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상당수 투표소에서는 해당 지역선관위가 긴급히 대처해 투표중단 사태를 막았지만 송파구는 동시다발로 여러 곳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한 상황이 벌어지는 바람에 대응이 늦어지고 사태가 커졌다. 송파구 선관위 직원은 총 13명인데 투표 당일 오후 1시부터는 직원 대부분이 개표소에 투입되는 바람에 신속한 대응이 어려웠다고 한다.

분노보다는 철저한 진상규명이 먼저

중앙선관위는 9일 시민단체와 법조계 등에서 추천한 6명의 외부인사로 이번 사태의 문제점과 원인, 책임소재를 조사하기 위한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려 열흘 동안 활동을 하도록 했다. 엄정하게 철저한 조사가 이뤄지길 바란다. 국회 국정조사와 검경합동수사본부 활동도 진행될 예정이다.

중앙선관위는 그동안 이런저런 문제가 노출되기는 했지만 투명성 공정성을 기치로 지구촌에서 안정적인 K-선거관리로 부러움을 사왔다. 조사는 철저히 하되 교각살우의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불순한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의 사악한 흔들기도 경계해야 마땅하다.

이계성

전 한국일보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