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기술주권, 전략기술에 국가역량 모아야
2001년 3월, 필자가 미국 실리콘밸리 시스코 시스템즈에서 하드웨어 엔지니어로 근무하고 있을 당시 회사는 전년도 실적악화로 대규모 해고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결국 전체 인원의 10% 이상이 감축됐지만 모든 라우터의 핵심부품인 반도체를 설계하는 우리 부서원 200명은 한명의 낙오자 없이 연구에 매진할 수 있었다.
2021년 4월,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은 '글로벌 화상 반도체 대책회의'에서 반도체 원료인 웨이퍼를 손에 들고 반도체 자립을 선언했다. 미국 대통령이 글로벌 기업을 모아놓고 국제적으로 분업화된 반도체 공급망을 다시 미국 중심으로 재편해 미국 내 반도체 산업을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 기술패권 경쟁시대를 살고 있다. 반도체를 비롯한 과학기술은 단순 기술을 넘어 국가의 경제·산업과 안보, 더 나아가 생존까지 위협하는 전략적 무기가 되고 있다. 선도국들이 국익 증진을 목적으로 기술 우위확보 경쟁에 총력을 기울이고, 자국 중심으로 기술을 보호하면서 과학기술을 둘러싼 국제질서가 급격히 바뀌고 있다.
첨단기술에 대한 역내 공급망 강화뿐만 아니라, 양자기술과 같이 아직 상용화가 되지 않은 신흥기술까지 국가 간 기술통제의 범위를 확장하려는 움직임도 본격화되고 있다. 기술력이 뒤처지면 앞으로는 쫓아가기도 선도국가들과의 협력 테이블에 초대받기도 어려워질 것이다.
과학기술이 국가생존과 안보 좌우
지난해 말 미래 기술주권 확보를 목표로 인공지능, 반도체·디스플레이, 우주·항공, 양자 등 10개 전략기술을 관계부처 합동으로 발표했다. 대외협상력 및 글로벌 가치사슬 전반의 전략성에 초점을 맞추어 우리나라가 반드시 주도권을 확보해 나가야 할 필수적 전략기술을 선별했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이 '기술'을 중심으로 공급망, 경제, 안보 전략을 구체화하고 있는 국제적 흐름을 반영한 것이다. 과학기술이 국가생존과 안보를 좌우하는 기술패권 경쟁시대, 결국은 우리만의 초격차 기술과 대체불가 원천기술을 얼마나 확보하느냐가 핵심이다.
선도국과 비교해 자원이 한정적인 우리나라는 정교하게 설계된 맞춤형 전략이 불가피하다. 글로벌 가치사슬과 경쟁우위 관점에서 우리의 강점과 위협요인을 철저히 분석하는 것이 먼저다. 우리 기술·산업 경쟁력에 따른 차별화된 전략과 집중적 투자로 신속한 기술력을 확보하도록 민관이 함께 협력해 나가야 한다.
또한 기술주도권 확보와 직결되는 국제표준선점, 공급망·수출통제 등의 국제협력·공조 전략도 핵심적 정책수단으로 구체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전략기술을 중심으로 연구개발(R&D), 공급망·통상, 외교·안보 등과 관련된 다양한 부처의 역량을 결집하고 정책을 조율해 나갈 범국가적 협업체계 강화가 절실한 시점이다.
법제정으로 기술선도국 도약 기회될 것
지난 1월 국회에서 '국가전략기술 육성에 관한 특별법'이 발의되었다. 신속한 법 제정을 통해 기술주권 확보를 위한 범국가적 노력이 흔들리지 않고 힘있게 추진되길 기대한다. 맞춤형 전략을 통해 전략기술 육성에 국가역량을 결집한다면, 글로벌 기술경쟁과 블록화는 우리에게 위기가 아닌, 기술선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