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북한의 민족관계 폐기와 한반도 전쟁설

2024-01-23 11:34:55 게재
홍 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북한의 김정은 당 총비서가 남북의 민족관계를 폐기하고 남북이 적대적 교전국가임을 선언했다. 헌법 명기도 예고했다. 개정 헌법에는 민족관계 폐기, 통일 포기, 정전협정 차원의 적대국 규정, 영토조항 신설 등이 예상된다. 오는 3월 입법기관인 최고인민회의 제15기 대의원 선거 직후 헌법 개정이 이뤄질 것이다. 최고지도자가 당 중앙위 전원회의와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 등 연이은 중대 회의에서 긴 분량으로 민족관계 폐기를 선언하고 ‘헌법화’를 추진하는 것은 남북관계에 대한 근본적 ‘전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행보로 보인다.

이제 민족관계에 기반한 대화나 협력, 한반도 긴장을 제어할 남북간 장치는 무력화됐다. 최초의 남북 합의였던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비롯해 1992년 체결돼 남북의 민족 특수관계, 교류협력과 통일지향의 규범이었던 남북기본합의서, 2018년 남북간 우발적 충돌 방지를 약속한 9.19 남북군사합의 등 기존의 모든 남북한 합의가 부정되고 무력화됐다. 북한은 남북간 대화와 교류협력 관련 기구들도 폐지했다. 남북 합의의 정신, 규범, 기구가 사라진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1953년 7월 체결된 정전협정과 북한의 규정한 교전국 상황만 남게 됐다.

북한의 의도는 무엇일까? 헌법화는 북한이 발신하는 가장 강한 메시지에 해당한다. 한시적 정책이 아닌 확고한 지속성과 장기성의 의지를 담고 있다. 김정은 집권 이후 특정 정책을 헌법화하는 것은 이번을 포함 두 차례다. 지난해 핵무력정책을, 이번엔 민족관계 폐기를 헌법에 명기하는 것이다. 핵무력정책의 헌법화는 북한의 핵무기 보유는 되돌이키기 어렵다는 불가역성을, 남북의 민족관계 폐기 및 적대적 교전국화는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는 북미라는 것을 각인시키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모두 대미용 메시지다. 11월 미국 대선을 앞두고 차기 미국 행정부를 향한 사전 정지작업의 성격이 강하다.

차기 미국 행정부 향한 정지작업 성격

북한의 민족관계 부정은 한반도 문제의 주도권 차원에서 보면 실리적 접근일 수 있다. 북한이 보기에 연합군을 대표하는 미국, 그리고 중국, 북한이 당사자로서 정전협정을 체결한 이후 남북간의 여러 합의를 통해 민족이라는 특수관계 규범이 한국의 당사자 지위를 부여해 왔다고 보는 것이다. 민족관계를 폐기함으로써 정전협정만을 남기고 민족이라는 특수한 관계를 지워버려 당사자에서 배제하려는 의도다. 북한은 한국이 민족이라는 특수관계를 명분으로 한반도 문제에 개입하여 북미간 협상이나 담판의 구도를 방해하거나 오히려 북한을 적대하는 정책을 부추기고 있다고 본 것이다.

북한은 2018~2019년 한국을 활용하여 북미대화를 했으나 3자 구도로는 북한식 셈법이 관철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한 바 있다. 북한은 현재 한국이 미일을 부추겨 대북 압박을 주도하는 적대적 행위자라고 보고 있다. 김정은은 민족관계를 북한식 국가전략의 장애물로 인식할 가능성이 높다. 한국에 대한 적대적 교전국 주장은 한국을 한국전쟁에 참전해 연합군을 구성했던 많은 국가 중 하나로 취급하고, 한반도 문제의 해결 당사자는 정전협정 체결 주체인 북미라는 논리를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반도 문제를 북미 문제로 귀속화하는데 쐐기를 박기 위한 일련의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이 최근 강조하는 ‘전쟁준비’나 전쟁 발발 가능성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북한은 핵무기 대남 사용에 장애가 됐던 ‘민족관계’를 폐기함으로써 한반도에서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엄포’와 함께 “적들이 건드리지 않는 이상 결코 일방적으로 전쟁을 결행하지는 않을 것”과 “일방적인 무력통일을 위한 선제공격”은 하지 않을 것임을 밝히는 방어적 의도 역시 내비쳤다. 공세성과 방어적 태도가 공존하는 것은 선제적 ‘전쟁’보다는 방어적 억제에 힘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한국을 적대적 교전국으로 규정함으로써 같은 민족에게 핵무기를 사용한다는 도덕적 족쇄, 통일논리의 모순을 벗어던지는 것은 핵무기를 수단으로 하는 대미 억제력의 제고 의미도 갖는다. 실제 전쟁을 도발하는 데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민족 굴레를 벗고 억제력을 제고하는 데 방점이 있을 수 있다.

한반도문제에서 한국 배제하려는 의도

그렇다면 북한은 왜 ‘전쟁’을 강조하는 것일까? 70년 이상 유지해 온 민족관계를 전제로 한 통일논리를 폐기하기 위해선 대내, 대남, 대미 차원의 명분이 필요하다. 하루 아침에 아무런 명분 없이 더 이상 민족이 아니라고 하긴 어렵다. 그 명분을 한국과 미국의 전쟁연습과 대북 압박을 통해 전쟁 위기를 가져오고 있다는 데서 찾았다고 볼 수 있다. ‘전쟁’, ‘대사변’, ‘전시체제’, ‘전쟁준비’ 등 전쟁이 실제화될 수 있음을 알리고 그런 전쟁 위기를 조장하는 한국이 더 이상 같은 민족일 수 없다는 논리다.

1년 반 전부터 북한은 ‘전쟁준비’를 강조해 왔다. 이미 북한은 한반도 문제에서 한국을 배제하기 위한 일련의 계획에 따라 움직여 왔을 가능성이 높다. 북한의 의도를 통미봉남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안일하다. 북한은 2019년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 이후 남북관계의 근본적 전환을 꾀해 왔다. 이번 민족관계 폐기는 일종의 충격요법이다. 민족이란 이름으로 행해진 ‘판타지’, ‘긍정적 착각’ 이면의 적대적 현실을 환기시키고 근본적 전환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반발로서의 남한 배제에서 혐오로서의 단절로 전환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