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하이저, 세계무역 뒤엎을 트럼프맨

2024-05-24 13:00:01 게재

트럼프 당선시 재무장관 유력 … 포린폴리시 “공화·민주 모두 그가 짜놓은 경로로 움직여”

지난 10년 미국 무역정책은 단 한 사람의 주장에 따라 재구성됐다. 바로 트럼프정부 시절 무역대표부(USTR) 대표를 지낸 로버트 라이트하이저다. 미국은 트럼프정부를 거치며 60년간 지지해 온 규칙기반의 다자간 무역시스템을 벗어나 강력한 국수주의적 접근방식으로 전환했다. 라이트하이저의 후임자인 바이든정부의 캐서린 타이 USTR 대표도 라이트하이저가 제시한 길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 전 대표 로버트 라이트하이저(사진 가운데) 사진 로이터=연합뉴스

라이트하이저는 트럼프가 결함이 있지만 더 큰 공익을 위한 그릇이라는 믿음을 지키고 있다. 그는 2024년 대선에 나선 트럼프의 최고 정책고문 중 한명이다. 포린폴리시는 지난 18일 온라인판 기사에서 “라이트하이저는 오는 11월 트럼프가 승리할 경우 재무부장관 등 더 높은 직책을 맡게 될 전망”이라며 “무역정책뿐 아니라 미국의 국제경제 정책을 전반적으로 변화시키려는 라이트하이저의 임무는 이제 막 시작됐다”고 전했다.

포린폴리시에 따르면 라이트하이저의 영향력은 공화당에 그치지 않는다. 바이든정부는 최근 중국산 수입 전기차에 100% 관세를 부과하고 중국산 반도체, 리튬이온배터리, 태양전지, 철강 및 알루미늄에 대한 관세를 인상했다. 특정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관세는 라이트하이저의 촉구로 트럼프정부가 처음 부과했다. 바이든정부는 또 라이트하이저가 부활시킨 1970년대 미국의 무역일방주의 도구인 301조 조사를 꺼내 중국의 조선산업 보조금에 대한 새로운 조사에 착수했다. 더 많은 관세가 뒤따를 전망이다.

포린폴리시는 “라이트하이저의 영향력 확대는 가장 가까운 동맹국을 포함한 미국의 무역파트너들에게 트럼프 무역정책의 공격적인 민족주의가 한때 지나가는 단계가 아니라는 경고를 보내는 것”이라며 “미국은 여야를 막론하고 국제경제 정책에 대한 ‘미국우선주의’ 접근방식을 수용하기로 선택했다. 그 선택의 영향은 앞으로 수년, 어쩌면 수십년 동안 지속될 전망”이라고 전했다.

라이트하이저는 차세대 미국 국제경제 정책의 설계자가 될 것 같지 않았던 인물이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에 태어난 그는 변호사로서 경력의 대부분을 외국과의 경쟁에서 미국 철강산업을 보호하는 데 보냈다. 철강은 한때 미국 제조업의 중심산업이었지만 이제는 정보기술, 성장하는 녹색산업, 고등교육과 관광을 포함한 서비스분야에 자리를 내줬다. 하지만 그가 철강에서 얻은 교훈, 즉 미국의 무역파트너들이 생산보조금을 지급하고 원가 이하로 제품을 덤핑하는 등 약탈적인 관행에 가담해 미국의 일자리를 빼앗고 제조업을 공허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이제 양당의 정치인들에게 복음이 됐다.

라이트하이저의 2023년 저서 ‘자유무역은 없다(No Trade Is Free)’는 무역자유화를 신랄하게 고발한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부터 버락 오바마에 이르기까지 미국 대통령들은 협상을 통해 글로벌 무역장벽을 축소하면 미국과 세계를 더 부유하고 안전하게 만들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라이트하이저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레이건행정부 시절 USTR에서 잠시 근무한 그는 2001년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에 대해 강력 경고하면서 유명세를 탄 바 있다.

라이트하이저는 변덕스러운 트럼프 대통령의 4년 임기 내내 무역대표로 일했다. 그는 전세계 대부분의 국가에서 수입하는 철강과 알루미늄에 최대 25%의 관세를, 중국의 대미 수출 3/4에 비슷한 관세를 부과했다. 또 캐나다와 멕시코를 북미자유무역협정 재협상에 끌어들였다. 바이든정부는 초기 재닛 옐런 재무장관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중국 관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는 진단이다. 라이트하이저의 핵심지표는 기존 경제학자들이 거의 주목하지 않는 무역적자다. 미국은 1975년 이후 매년 상품과 서비스 분야에서 적자를 기록해 왔다. 2022년에는 무려 9510억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무역적자가 미국의 높은 소비와 낮은 민간·공공 저축률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여긴다. 따라서 무역 측면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 큰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라이트하이저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무역적자는 미국의 부를 경쟁국, 특히 중국으로 직접 이전하는 것으로 보고 정부의 강력한 조치를 통해 이를 시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중국뿐 아니라 전세계와의 무역균형을 맞추는 것을 정책의 목표로 삼을 태세다. 그 의미는 엄청나다. 라이트하이저가 트럼프에게 제안한 것으로 알려진 한 가지 수단은 달러약세를 위한 공동의 노력이다. 포린폴리시는 “라이트하이저는 1971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1987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취했던 조치, 즉 무역상대국이 달러 대비 자국 통화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조치에 동의하지 않으면 관세를 부과하거나 위협하는 조치를 다시 구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하지만 라이트하이저가 가장 좋아하는 도구는 백악관에서 가장 명확하게 통제할 수 있는 관세다. 그는 올해 3월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기고문에서 “미국의 무역적자를 줄이고 재산업화를 가속화하기 위해서는 전반적으로 최소 10%의 새로운 관세와 더 높은 목표 관세가 필요하다”며 “경험에 따르면 이러한 정책은 성공할 것이며 고임금 산업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저서는 이러한 노력이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 시사한다. 책에서 그는 “모든 수입품에 대해 균형을 이룰 때까지 해마다 점진적으로 더 높은 비율로 관세를 부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수입품 관세가 완전히 면제되는 ‘최소허용기준(de minimis)’을 없애거나 손볼 수 있다. 2015년 무역촉진 및 무역집행법을 통해 의회는 소액 소비재 배송의 경우 비용이 많이 드는 서류작업을 없애기 위해 최소허용기준을 200달러에서 800달러로 인상했다. 이 덕분에 2015년 전세계적으로 300만건 미만이었던 중국 패스트패션기업 ‘쉬인’의 쇼핑앱 다운로드 수는 지난해 2억6000만건 이상으로 증가했다. 연매출 300억달러 이상의 거대기업으로 성장한 쉬인은 현재 미국 내 매장이나 브랜드 없이도 미국 패스트패션 시장의 약 30%를 장악하고 있다. 라이트하이저는 이 조항으로 많은 중국기업이 아무런 상호주의 없이 미국시장에 면세로 접근할 수 있게 됐다고 주장한다.

11월 대선에 누가 승리하든 라이트하이저의 영향력은 그대로 유지될 전망이다. 바이든정부는 선거의 해를 맞아 보호무역주의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트럼프 지지성향의 오하이오주에서 힘든 재선 싸움에 직면한 바이든은 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를 막겠다고 약속했다.

라이트하이저와 민주당의 공통점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깊다. 트럼프를 포함한 많은 공화당원들은 기후변화에 회의적이며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기 위한 정부의 조치에 반대한다. 하지만 라이트하이저는 유럽연합(EU)이 이미 시행하고 있고 현재 바이든정부가 진지하게 검토중인 ‘탄소국경세’를 선호한다. 그는 ‘자유무역은 없다’에서 “시멘트와 비료, 알루미늄 등 탄소배출 집약적인 제품에 추가 관세를 부과하는 탄소국경세를 도입하지 않으면 우리가 용인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탄소를 사용하는 상품을 생산하는 국가에 혜택을 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바이든정부는 무역도구를 활용해 전세계 인권·노동권 침해기업을 제재하는 데 적극적이다. 라이트하이저는 그보다 훨씬 더 앞서갈 전망이다. 그는 책에서 “수출기업이 환경보호, 노동규칙, 노동자건강 및 안전에 대한 미국 수준의 표준을 준수하지 않는 한 모든 수입을 차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러한 이니셔티브의 가장 큰 타깃은 물론 중국이다. 중국을 무역파트너가 아니라 적으로 간주하는 정책으로의 전환을 시작한 것은 트럼프정부였다. 라이트하이저는 이러한 변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2000년 미의회가 중국의 WTO 가입을 허용하기 위해 부여한 ‘최혜국’ 지위를 박탈할 것을 제안한다. 그렇게 되면 미국 대통령은 중국에 차별적인 관세를 부과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를 얻게 된다.

물론 민주당 측에서 그렇게 멀리 가자고 제안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금까지 바이든정부는 반도체 및 전기차와 대부분의 일반 소비재를 구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작은 마당, 높은 울타리(small yard and high fence)’와 ‘중국리스크 관리(derisking)’라는 문구로 요약되는 바이든정부의 전략은 여전히 미중무역에서 상호이익을 얻을 여지가 많다는 쪽이다.

하지만 중국이 위협으로 인식될수록 라이트하이저의 포괄적인 대중국 분리 논리는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될 전망이다. 그러나 많은 전문가들이 우려하는 것보다 혼란은 크지 않을 수 있다. 트럼프가 관세를 부과했을 때 글로벌 무역시스템은 생각보다 탄력적으로 회복했다. 미중무역이 소폭 하락하고 인플레이션이 소폭 상승하는 데 그쳤다.

포린폴리시는 “민주 공화 양쪽에서 보호무역주의의 인기가 높아지는 것은 앞으로 더 많은 일이 있을 것임을 시사한다. 다른 국가들도 미국 조치에 일대일 대응에 나선다면 1920년대와 30년대 벌어졌던 무역·환율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예고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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