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건의 나이키와 강릉의 커피
나이키 창업자 필 나이트, 변방의 도전정신 강조 … 공간의 재해석 가능성
아마도 가장 유명한 우리말 오역은 미국 소설가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마지막 문장일 것이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니까”의 원문은 “어쨌든 내일은 또 다른 날이니까(After all, tomorrow is another day)”다. 역자의 의도가 다분히 들어갔음에도 이러한 초월 번역이 널리 사랑받는 이유는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희망을 품는 행위가 그만큼 자연스럽기 때문일 테다.
새해를 맞이하며 해돋이를 빠뜨리지 않는다. 2025년의 첫 태양을 고향인 강릉 바다에서 바라봤다. 지난 3년간 일출의 무대는 미국 서부였다. 샌프란시스코 금문교로 떠오르는 태양은 분명 장관이었지만 그럴수록 필자는 동해의 일출을 그리워했다. 나고 자란 곳의 정서가 여전히 마음에 남아있는 까닭이다. 실리콘밸리에서 근무하며 틈날 때마다 세계적 기업이 탄생한 지역을 방문했다. 정서적으로 통하는 공간은 언제나 고향을 닮아 있었다. 특히 오리건(Oregon) 주가 그랬다. 오리건은 필 나이트가 나이키를 창업한 곳이다.
신발회사지만 이야기를 파는 나이키
2025년 1월 기준, 나이키의 시가총액은 1050억달러가 넘는다. 2위 룰루레몬과 3위 아디다스는 나이키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나이키의 위기설이 심심찮게 흘러나오지만 여전히 압도적 시장 규모임을 숫자가 보여준다. 나이키의 천문학적 숫자를 지탱하는 힘은 이야기다. 나이키는 신발회사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판다.
영국 브랜드전략 컨설팅회사 ‘밸류엔지니어스’ 대표 자일스 루리의 저서 ‘죄수와 펭귄’을 보면 나이키에는 에킨(Ekin)이라는 직책이 있다. 나이키 철자를 거꾸로 뒤집은 이 사람들은 기업의 스토리텔러다. 이들은 핵심간부부터 영업사원, 매장에서 포스(POS)를 담당하는 시간제근로자까지 모든 직원에게 나이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다닌다. 나이키 에킨의 최고책임자인 넬슨 패리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임무는 나이키가 얼마나 흑자를 보았다거나 전략이 어떻다거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의 나이키를 만든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나이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들을 수 없다면 눈으로라도 보고 싶었다. 실리콘밸리에서 처음 떠난 여름휴가의 행선지는 나이키가 탄생한 오리건주였다. 집에서 나이키 세계본부(World Headquarters)가 있는 비버턴까지는 662마일, 1065㎞ 떨어져 있었다. 차로 10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아침 일찍 길을 나섰지만 끝도 없는 운전이 계속됐다. 목적지를 목전에 두었지만 가족의 안전을 생각해 유진(Eugene)에서 하룻밤 묵기로 했다. 유진은 필 나이트가 육상선수로 활약한 오리건대학교가 있는 곳이다.
필 나이트는 나이키 창업과 성장을 다룬 자서전 ‘슈독’을 “나는 세상 누구보다 일찍 일어났다(I was up before the others)”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유진에서 운전의 피로를 녹인 다음날 새벽 자연스레 눈이 떠졌다. 멀뚱멀뚱 천장을 쳐다보다가 ‘슈독’의 첫 문장을 떠올렸다. 잠에 빠진 가족을 뒤로하고 숨죽이며 호텔 방을 빠져나왔다. 어두컴컴한 도시에서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윌래밋강을 따라 오리건대학교로 향하는 동안 품었던 의문은 “나이키는 왜 꼭 오리건에서 시작해야만 했을까”다.

나이키, 인구 10만 도시에 본사를 둔 이유
지난달 미국 인구조사국에서 공개한 통계에 따르면 오리건주에는 427만명이 산다. 미국 전체 인구 3억4000만의 1%가 조금 넘는 숫자다. 50개주 중에서 오리건은 27위를 차지했다. 단순히 인구 규모로 봤을 때 오리건은 미국에서 중간 이하다. 여기서 나이키가 세계를 대표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나이키는 처음부터 오리건을 고집했다. 왜 변방이나 다름없는 오리건이어야만 했을까. 창업자의 배경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필 나이트는 ‘슈독’ 초반부에서 오리건 사람으로서의 긍지를 서술한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유년 시절 선생님의 말을 인용한다. “오리건의 오솔길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가진 권리 기질 운명 DNA라고 할 수 있지. 겁쟁이들은 올 생각조차 못 했어. 약한 사람들은 도중에 죽었지. 이렇게 해서 살아남은 자들이 바로 우리 오리건 사람들이야.” 이처럼 필 나이트는 19세기 중반 골드러시 시절 오리건 가도를 따라 3490㎞를 걸어온 사람들의 후예로 자신을 정의한다.
황무지를 개척해 길을 내야 했던 오리건 사람답게 필 나이트도 황야에서 나이키를 시작했다. 실패한 육상선수로서 새로운 진로를 찾아 경영대학원에 진학한 그는 1962년 기업가정신 수업시간에 신발회사를 창업할 아이디어를 발표한다. 동료들에게서 돌아온 반응은 ‘미친 생각’이라는 냉담한 시선이었다. 오리건 사람, 필 나이트는 굴하지 않았다. 아디다스 같은 독일 브랜드가 지배하던 당시 세계 스포츠웨어 시장에 일본산 운동화가 선전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도쿄를 거쳐 고베로 건너간다. 그는 결국 오니츠카 타이거의 미국 서부 독점판매권을 따낸다. 나이키의 출발은 일본 신발을 떼다 파는 일이었다.
회사가 성장가도를 달리면 정체성을 가다듬어야 하는 순간이 반드시 오게 마련이다. 필 나이트는 직원 두명이던 시절 나이키 사무실을 옮기면서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행여 손상되지 않을까 우려하던 시점을 회상한다. “나는 주변 환경이 우리의 정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우리의 정신이 우리의 성공에서 커다란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조직형 인간과 자동 장치가 만연한 회사와 건물을 함께 쓰면 우리의 정신이 어떻게 변할지 걱정이 앞섰다.” 나이키가 세계를 선도하는 회사가 되고도 인구 10만명이 되지 않는 작은 도시 비버턴에 본사를 두고 있는 이유를 여기서 추론할 수 있다.
2021년 6월, 영국 판촉용 제품 소매기업 ‘포임프린트(4imprint)’는 자사 고객 1000명을 상대로 가장 인상적인 브랜드 로고가 무엇인지 조사했다. 나이키의 ‘스우시(Swoosh)’가 44%로 애플의 한입 베어먹은 사과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스우시 역시 오리건이 낳은 작품이다. 나이키의 성공을 위해 매진하던 필 나이트지만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포틀랜드주립대학교에서 회계원리도 가르쳐야 했다.
이때 강의실 복도에서 우연히 저널리즘과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하는 학생 ‘캐롤린 데이비슨’이 그린 그림을 보게 된다. 필 나이트는 충동적으로 데이비슨에게 나이키 글씨체를 도안하고 광고물을 만들어 달라며 시간당 2달러를 제안한다. 데이비슨은 수락한다. 필 나이트가 급하게 축구화에 채울 로고를 디자인해달라며 내린 주문은 그저 ‘동적인 느낌(a sense of motion)’이었다. 작업물에 대한 대가는 35달러였다. 당시에는 누구도 이 로고의 앞날을 상상하지 못했다.
변방도 재해석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올해 강릉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거듭한 다짐은 미국 서부에서 곁눈질한 가치를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재해석할 수 있을지 궁리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혹자는 나이키의 성장은 미국이니까 가능한 일 아니었느냐고 반문할는지도 모르겠다.
2023년 개봉한 벤 애플렉 감독의 영화 ‘에어’는 나이키가 마이클 조던을 영입하는 과정을 다룬다. 시나리오를 보면 유명 스포츠 에이전트가 주인공인 나이키 담당자에게 “웬만한 회사들처럼 동부에다가 본부를 둘 수는 없니?”라고 비꼬는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은 대답한다. “그들은 여기를 사랑해(They love it here).” 물론 그들은 필 나이트를 비롯한 오리건 사람들이다. 나이키가 미국에서도 변방에 해당하는 오리건에 뿌리를 두고 성장했다는 점은 끊임없이 중심을 지향하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다시 찾은 강릉이 커다란 자극이 되었다. 필자가 학창시절을 보내던 1990년대만 하더라도 강릉은 커피도시가 아니었다. 안목항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마시는 몇백원짜리 자판기 커피 정도가 커피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다. 그랬던 강릉이 전국적 커피도시가 되었다.
금융위기 때 명예퇴직한 어느 은행원이 2000년대 초반 고향에서 원두커피 공장을 창업하면서 커피도시가 움을 틔웠다. 공장의 위치는 강릉에서도 외딴곳인 구정면 어단리다. 이는 필 나이트의 오리건처럼 우리에게도 공간을 재해석할 가능성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일출을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에는 강릉의 기운이 들어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