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행동
확증편향적 영구기관론자와 원칙 지키기
대통령의 난데없는 비상계엄 선포와 국회의 탄핵소추 의결로 온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 조선 말 황 현(1855~1910)이 망국을 통분해 스스로 절명하며 남긴 시 한 구절이 연말 내내 머리를 쳤다.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천 년의 역사를 돌아보니, 이 난세에 배운 값하며 살기가 참으로 어렵구나.’ 배운 값하려고 발버둥 쳐 온 세월이 허망하고 자괴감이 차올랐다.
마침 아들 내외와 함께 안동으로 가족여행을 떠났다. 차디찬 겨울바람을 맞으며 병산서원 만대루에 올라 강 너머 설산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 옛날 선비들이 왜 세상을 등지고 이 두메산골에서 책을 읽고 살았는지 가늠이 되었다. 시골 고즈넉한 숙소 담 넘어 동네 아침의 평화로움엔 왠지 모를 분노가 치밀었고 점심을 먹으러 들어간 시골장터 노포식당의 정겨움엔 목이 멨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이런 혼란이 일어날 수 없는 나라다.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가 넘는 국가에서 도대체 상상이 안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 와중에도 머릿속에는 이번 칼럼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또 다른 차원의 고민이 차 있었다. 전대미문의 정치적 혼란이 온 나라를 뒤덮고 있는 상황에서 에너지와 기후문제로 글을 쓴다는 것이 가당치가 않았다. 마감 날짜를 알려주기 위해 연락을 준 기자에게 푸념했다. “이 난리에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상대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원칙 대로요!”
난제 부닥칠 때마다 원칙으로 돌아가면 돼
이 전대미문의 혼란은 원칙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국가권력의 본질적 목적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며, 공공선과 번영을 추구하는 데 있다. 국가 지도자는 이러한 목적에 기반해 무거운 책임감으로 권력을 사용해야 한다. 이 원칙을 망각한 지도자로 인해 온 나라는 혼란과 갈등의 도가니에 휩싸이고 말았다.
원칙을 망각함으로 국가와 인류에 선하지 못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자들은 비단 이 인물만은 아닐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혼란은 원칙에 무감각하거나 망각한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이 기회에 우리가 처한 각자의 상황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원칙들에 얼마나 충실하고 있는지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오래 전 대학원생 시절 연료 없이 무한히 동력을 생산할 수 있는 영구기관을 발명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학교로 찾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교수님은 짓궂게도 그들을 연구실로 보내 학생들과 논쟁을 벌이게 했다. 영구기관론자들의 설명은 장황했지만 오류는 늘 단순했다. 모든 동력은 어떠한 형태로든 연료가 있어야 만들어질 수 있다는 열역학 제1법칙을 위배하거나, 열은 항상 높은 온도에서 낮은 온도로 흐른다는 열역학 제2법칙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오류들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판단이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 이외의 모든 것을 무시하는 확증편향적 사고로 무장한 영구기관론자들의 주장들을 학생들이 감당하기에는 버거웠다. 이들은 열역학적 법칙이라는 물리적 원칙에 대한 지식이 결여된 막무가내형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다른 기관들을 찾아가서 논쟁을 벌이거나 정부에 투서를 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논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어떤 영구기관론자들은 뛰어난 언변과 능력으로 투자를 받고 언론 홍보도 잘했다. 과학적 원칙에 친숙하지 않은 대중은 원칙을 무시한 발명들에 환호했고 그 결말은 늘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원칙이란 간단명료하며 거대담론을 제공한다. 열역학적 법칙 또한 그러하다.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들이 이 원칙을 기반으로 자동차와 비행기 엔진을 만들고 전기를 생산하는 발전소를 만들었다. 그 결과 오늘날 온 인류가 그 혜택을 누리고 있다. 개발 과정에서 난제에 부딪힐 때마다 이 원칙으로 되돌아가 유추하면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다. 열역학적 법칙을 충실히 공부하고 실력과 소양을 갖춘 준비된 전문가들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에너지정책, 공공성 우선하는 논리는 없어
지금의 혼란이 정리가 되면 또다시 정치의 계절이 올 것이다. 지금까지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가 에너지정책 방향이 갈지(之)자였으니 시름이 깊다. 기후변화 문제든, 에너지 안보 문제든 국가의 역할이 중요하니 에너지정책의 정치화는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떠한 진영 논리도 개인적인 사사로움도 국가 에너지정책의 공공성에 우선해서는 안된다. 정책 수립 과정들은 공익성을 훼손시키려는 시도가 파고들 수 없도록 투명하고 설득력을 지녀야 한다. 그래야 여기서도 확증편향적 영구기관론자들의 출현을 막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