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호 칼럼
최대 시험대 오른 K-민주주의
윤석열 대통령 구속에 반발한 시위대가 서울서부지방법원에 침입해 난동을 부리는 장면을 보면서 이제 정말 갈 데까지 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독재 시절에도 거의 없었던 극우 폭도의 사법부 침탈이 그때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자행되는 모습에 등골이 써늘했다.
77년 헌정사에서 중대한 법원 폭력 침탈은 두차례 있었다. 반공청년과 무장군인이라는 극단적 세력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이다. 반공청년 법원난입사건은 1958년 7월 5일 진보당사건 1심 판결에 불만을 품은 대한반공청년회 소속 청년 200여명이 대법원 청사에 쇄도해 “친공 판사 유병진을 타도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고 대법원장 면담을 요구한 사건이다.
진보당사건은 이승만 대통령이 정적 조봉암을 제거하기 위해 공안조작을 통해 사법살인한 것으로 역사적으로 정리되고 있다. 2011년 재심을 통해 법적으로도 무죄가 확정됐다. 당시 자칭 ‘반공청년’들은 조봉암이 1심에서 5년 징역형을 받은 것이 가볍다며 사법부를 공박하는 행동을 벌였다.
무장군인법원난입사건은 1964년 5월 21일 새벽 권총과 카빈총으로 무장한 육군공수단 소속 군인 13명이 서울형사지방법원에 침입한 사건이다. 이들은 시위학생 영장기각에 불만을 품고 당직실을 찾았다가 숙직하던 양 헌 판사가 퇴청한 것을 알고 다시 그의 집으로 몰려가 영장을 발부하도록 협박했다. 한일회담 추진 과정에서 학생들의 강한 저항에 직면한 박정희 대통령은 이 사건 2주 후 6.3계엄령으로 학생시위를 진압했다.
전무후무한 일이 꼬리를 무는 상황
민주화 도정의 암울한 시대에 벌어진 두 사건은 지난 1월 19일 새벽 윤석열 대통령 극렬 지지자들이 벌인 서울서부지법 난입폭력사건에 비하면 신사적이었다. 대법원장 면담과 영장 발부가 요구사항의 핵심이었고 위력시위는 있었지만 폭력은 없었다. 그럼에도 당시 언론 등에서 ‘국가존망을 위협’한 사건으로 중대하게 다룬 까닭은 국가의 사법기능을 법치 실현과 헌정질서 수호의 최후 보루로 여겨서였다. 파괴와 폭력, 테러위협까지 막나간 1.19사태는 이를 부정한 전무후무의 사건이라고 할 것이다.
돌이켜보면 전무후무한 상황은 12.3비상계엄부터 시작됐다. 국회의 계엄해제 결의,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현직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과 구속영장 발부 등 예상하기 어려운 일들이 현실화했다. 체포영장 집행을 둘러싸고 공권력 간 대치하는 장면도 연출됐다. ‘내전’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대부분의 상황은 국가 법체계를 무시하고 공권력을 거부하는 윤 대통령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지만 이런 전무후무한 일이 꼬리를 무는 상황에 우리는 물론 세계가 놀라고 있다.
전무후무하다는 말은 전에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 말이 지금처럼 가볍게 들리기는 처음이다. 전에 없던 일이 버젓이 일어나고 앞으로도 없을 일이 또 일어나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이 그런 일을 자꾸 만들고 1.19사태와 같은 일이 또 언제 다시 벌어질지 모르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3일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후 국내외에서는 한국의 민주주의 회복력을 많이 언급하고 있다. 국회의 계엄해제 결의 후 “한국 민주주의 회복성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다”고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이 평가한 이래 미국은 윤 대통령 탄핵표결 체포 구속 등의 고비마다 지지를 보내고 있다. 국내외 언론 정치권 시민사회 등도 표현만 다를 뿐 같은 반응이다.
한국 민주주의 회복력에 대한 국내외의 절대적 신뢰는 우리 민주화 도정과 무관치 않다. 크게는 부정선거 군사쿠데타 친위쿠데타 내란 국정농단, 작게는 앞에 언급한 사법부침탈사건 등 수많은 민주주의 파괴에 저항하고 극복해온 경험이 뒷받침된 것이기 때문이다. 실패하기 어려운 친위쿠데타, 즉 12.3비상계엄이 실패한 것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국회로 모인 시민의 역할은 물론 민주적 시민의식을 가진 계엄군의 소극적 대응 덕분이다.
민주주의 회복력 강하지만 파괴에도 관대
1.19사태는 한국 민주주의가 전무후무한 상황을 맞아 회복력에만 기대고 있을 수만은 없는 현실을 잘 말해준다. 파괴력은 그 정도와 양상만 다를 뿐 언제든지 작용해왔다. 법원에 난입한 반공청년과 무장군인을 ‘우국충정의 발로’로 두둔했듯이 1.19사태 피의자들의 ‘억울하고 분노하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는 윤 대통령의 입장에 동조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다. 최근 ‘내란 옹호’ 비판을 받는 국민의힘의 지지율이 상승한 여론지형도 이를 뒷받침한다.
우리 정치공동체가 민주주의 파괴에 관대한 측면도 있다.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와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사면 등이 그 결과다.
지금 한국 민주주의는 회복력만이 아니라 파괴력도 거칠게 작동하는 혼돈에 빠져 있다. 백척간두의 시험대에 서 있는 상황이다. 여전히 회복력에 기대를 걸고 믿고 있지만 불안감을 떨칠 수 없다. 긴장을 늦춰서는 안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