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전쟁참화 빗겨간 것만도 천행이었다

2025-01-23 13:00:02 게재

천행(天幸)이다. 대통령 직무정지 후 거듭된 소환에 불응하다 끝내 체포·구속된 윤석열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에 자진 출두해 내뱉은 말들과 그간 행적들을 곰곰 되새기며 새삼 굳어진 생각이다. 스스로 자멸함으로써 모두를 구했다.

뻔뻔스런 거짓말과 책임 떠넘기기. 온 국민이 속속들이 지켜본 내란행위와 친위쿠데타에 동원된 군 사령관들의 일치된 ‘자백’에 대해서조차 후안무치 모르쇠 거짓말로 딱 잡아뗐다. 국회 본회의장에 들어가 의원들을 끌어내라는 지시를 했다는 사실도, 국가비상입법기구 구성 쪽지를 전달한 사실도 모조리 부인했다.

폭도들의 계획된 서부지방법원 난입. 헌정사상 최초로 사법부가 폭도들에게 공격당하고 법치가 근본적으로 흔들리는 것쯤은 윤 대통령 안중에 없다. 극렬지지자들을 더욱 선동하고 자극해 어떻게든 감옥행을 늦추겠다는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인다. 이런 비열한 자가 친위쿠데타에 성공했더라면 어쩔 뻔 했는가.

헌정사상 최초 사법부 공격 불 지른 윤석열의 2차내란 선동

헌정질서를 송두리째 파괴한 내란도 내란이지만 망상에 사로잡혀 한반도에 전쟁참화를 부르는 행위조차 서슴지 않았다. 구속된 수하들의 일치된 진술과 차고 넘치는 증거들은 그가 친위쿠데타를 통해 무엇을 꿈꾸었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검찰공화국 힘만으론 안 되니 군을 동원하겠다는 망상. 오랜 전부터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그럴싸한 여건을 조성해서 작전 개시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헌법상 비상계엄을 선포할 요건은 ‘전시, 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 시’ 뿐이다. 권력을 쥔 집단이 일으키는 친위쿠데타 비상계엄이니 만큼 이런 요건을 웬만큼만 충족시킨다면 정치적 비난을 받을지라도 즉각 실패로 돌아갈 확률은 지극히 낮다.

남북이 군사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을 조금만 자극해 군사적 조치를 취하도록 유도한다면 이를 부풀려 ‘전시, 사변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로 쉽게 둔갑시킬 수 있다. 윤 대통령은 이런 사태를 조성하기 위해 9.19남북군사합의를 파기하고 대북확성기방송을 재개했다. 전처럼 북이 방송시설에 총격을 가하면 몇배로 보복하며 충돌양상을 증폭하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북은 총격도발 대신 대남방송으로 응수했다. 과거 연평도포격으로 대응했던 서해 북방한계선(NLL)과 군사분계선 일대에서의 대규모 포사격훈련에 대해서도 웬일인지 말폭탄으로만 반응했다.

북한이 좀체 반응하지 않자 군사적 자극은 갈수록 노골화했다. 평양상공에 무인기를 날려 김정은 비난삐라를 살포한 것은 가장 노골적인 자극행위였다. 북한의 정전협정 위반 비난에 정부는 처음엔 부인하더니 곧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말을 바꿨다. 친위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간 뒤 단편적으로 드러나는 사실은 국가안보실의 은밀한 지시에 따라 드론사령부와 방첩사령부, 정보사령부 등이 합작해 추진했다는 것이다.

김용현 국방장관이 “북한이 오물풍선을 날리는 원점을 타격하라”고 ‘지시’했으나 김명수 합참의장이 전쟁발발을 우려해 거부했다는 ‘내부폭로’도 나왔다. 원점타격이 실행됐다면 북한 영토를 타격한 것이니 곧바로 전쟁에 돌입할 위험성이 컸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든 비상계엄 요건인 ‘전시, 사변’ 사태는 사전에 조성되지 않았다. 사전 계엄요건 조성엔 성공하지 못했지만 사후에라도 유사한 상황을 만들어내면 되지 않겠느냐는 ‘수정각본’에 따라 급히 서둔 게 12월 3일 밤 거사다. 왜 하필 이날을 선택했는지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국회가 계엄해제 결의에 필요한 인원을 단시간 안에 집합시키는데 어려움을 겪었을 날이 많았을 터인데도.

사후 친위쿠데타 명분 만들기 위해 HID 동원 ‘음습한 작전’ 모의

사후에라도 ‘전시, 사변에 준하는 사태’를 조작해내기 위해 비밀리에 선발해 대기시킨 정보사령부 산하 HID(북파공작원) 부대원들의 ‘음습한 작전기획’은 상상을 초월한다. 평소 북한군복 입고 북한말 쓰는 훈련을 거듭하면서 유사시 적진에 투입돼 요인암살 및 테러작전에 전문화된 비밀부대의 존재. 이들과 점조직으로 연결돼 평시엔 평범한 시민으로 살다가 일단 ‘임무’를 부여받으면 물불 안 가리고 수행하는 ‘블랙요원’들.

이들이 북한군으로 위장해서 테러와 소요사태를 일으키려 기획했다는 청주공항·대구공항 습격, 성주 미 사드기지 공격, 정치인 등 암살 시나리오는 스파이영화의 각본이 아닌 현실이었다. 음지에 숨겨져 있던 비밀조직을 백일하에 드러나게 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윤 대통령은 군사적으로 엄청난 해악을 끼친 것이다.

한반도는 굽이굽이 전쟁위기를 빗겨가며 또 한 고비를 넘겼다. 천행이다.

이원섭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