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현의 한반도 워치

대행체제의 외교, 어떻게 해야 하나

2025-02-03 13:00:03 게재

지난해 12월 3일 한밤중에 발표된 계엄 뉴스를 듣고 나서 불현듯 1987년 4월 정부가 호헌조치를 발표하던 때가 떠올랐다. 당시 정부의 발표 내용은 여야가 개헌에 합의하기를 바랐지만 야당의 억지로 합의가 안되니 개헌은 포기하고 현행헌법에 따라 후임 대통령을 뽑겠다는 것이었다. 또 시위대가 공산세력의 사주를 받아 반정부활동을 한다고도 했다.

호헌 발표에 따라 우리 외교관들은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을 뽑는 헌법이 얼마나 훌륭한지 외국 정부에 낯 뜨거운 설명을 해야 했다. 필자가 근무하던 브뤼셀에는 두명의 저명한 교수가 파견되어 한국 헌법의 우수성을 알리는 설명회를 열기도 했다. 하지만 전두환정권은 국민적인 저항을 견디지 못하고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겠다는 6.29선언을 발표했고 외교관들은 이제 개헌의 필요성을 홍보해야만 했다.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 우리 외교관들이 그때처럼 계엄령 선포가 불가피했음을 주재국 정부에 가서 설명해야 하겠구나 하는 참담한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계엄령은 해제되었고 헌정질서를 회복하는 과정이 시작됐다. 그러나 현재의 과도기는 외교관들에게 무거운 도전과제를 안겨준다. 대행체제의 외교는 어떻게 이번 내란 사태가 가져온 유형무형의 국가적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격동의 국제정치 상황에 대처해야 할 것인가?

대행체제의 최우선 외교과제는 우리가 헌법질서와 민주주의를 조속히 회복하는 데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와 협조를 확보하는 것이다. 민주국가 한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가 손상되지 않도록 과도기를 잘 관리해 나가는 것 또한 중요하다. 아울러 과도기 동안에 리더십 공백이나 국론분열로 인해 국익을 해치는 교섭이 이루어지지 않도록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계엄 잘못 인정하고 헌정질서 회복 설명

우선 대행체제의 외교 책임자들은 계엄이 잘못되었음을 깊이 인식하고 이에 대한 반성에서부터 출발하기를 바란다. 과도기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인식도 필요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자유민주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가치 외교를 주창해왔다. 작년 3월에는 제3차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주최하기도 했다. 그런 정부가 왜 헌정질서를 유린하는 계엄조치를 내렸는가? 우방국들의 정부 논평과 언론보도에서 배반과 당혹감이 읽힌다. 아직은 우리 외교부가 계엄 사유에 대한 공식설명을 내놓기 어려울 수 있다. 혹시라도 개인적인 설명이라도 해야 한다면 “편집증에 사로잡힌 대통령의 일탈”이라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행여라도 국회 탓을 하거나 한국의 역사나 정치문화의 취약성과 연계시켜 설명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폄하하는 것이며 자칫 계엄이 불가피했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따라서 대행체제의 외교 책임자들은 자기부정처럼 느껴지더라도 계엄의 잘못을 지적하고 한국의 민주주의가 여전히 견고하며 헌법적 질서가 빠르게 회복되고 있음을 일관되게 설명해야 한다. 아울러 민주국가로서의 정체성은 추호도 변함이 없음을 알려야 한다.

다음으로는 그간 지나치다 싶었던 외교정책에 대한 진지한 검토와 적절한 완화 노력이 필요하다. 이미 국방부는 우크라이나 참관단 파견 계획을 철회했으며 통일부도 대북전단 살포에 대해 신중한 접근으로 선회했다. 이제 외교부도 교조적 가치외교와 지나친 진영외교를 현실에 맞게 완화해야 한다.

윤석열정부는 초기부터 이전 정부를 반미·친중정부라면서 한미관계를 복원하겠다고 했다. 한미관계가 복원해야 할 정도로 나빴다는 것은 심한 왜곡이며 국내 정치에 이용하려는 도식화다. 윤석열정부가 한미관계를 더 강화하겠다고 했다면 무난하지 않았을까? 대행체제는 국내 정치에서 비켜나 과거 정부와의 외교적 연속성과 흐름을 인정하는 점진적인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국회와 소통, 주요국과 실용적 관계 유지

과도기적 상황에서 국회와의 관계도 중요하다. 여야가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외교 사안에 대해 합의해 내도록 노력해야 하겠지만 합의가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라면 대행체제는 합의된 만큼만 외교를 실행한다는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 어차피 외국 정부들이 대행체제를 중요한 교섭의 상대로 간주하지 않을 것임은 엄연한 현실이다.

또한 주요국과의 고위급 외교 회담이 생기면 소상히 상임위에 보고해야 한다. 여야간 견해차가 큰 사안을 외국과 협의하고 이를 비밀에 붙여두려 한다면 외교문제가 정쟁의 대상이 될 것이다. 사실 윤석열정부 국무위원들은 국회에서 야당에 대해 상당히 대결적이고 공격적인 답변 태도를 보여왔다. 이제 대행체제 외교부는 국내 정치와 거리를 두고 보다 객관적인 태도를 견지해 외교문제만큼은 국회에서도 대결보다 합의가 대세로 되어 나가기를 바란다.

트럼프정부가 출범하면서 큼직한 외교 현안들이 우리에게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거래적 협상과 럭비공 외교로 상대를 혼란케 만드는 트럼프답게 벌써 북한과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핵을 가진 북한’이라고 지칭함으로써 핵 보유를 기정사실화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는 국제법적인 핵보유국 인정이 아니며 편의적인 표현에 불과하다. 앞으로 궁극적 비핵화를 목표로 한반도 긴장완화와 평화구축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북미 협상이 이루어지도록 우리는 미국과 사전협의를 해 나가야 할 것이다. 대책 없이 북미협상을 반대만 하면 코리아 패싱이 나올 수 있다.

방위비 분담 논의는 우려의 대상으로 거론됐지만 이 문제를 우리가 먼저 미국에 제기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미국이 방위비의 대폭 인상을 요구해 오면 기존의 합의를 지키겠다는 선에서 대응하면서 협상을 차기 정부로 넘기고 차분하게 협상 대책을 만들어야 한다. 벌써 관세압력과 통상압력도 시작됐다. 이에 대해서는 경제계와 긴밀히 협조하면서 적극적 대응을 해야 할 것이다. 이외에 한·미·일 정상회담을 비롯한 다양한 한미간의 이슈는 기존 한미관계의 큰 틀을 유지해야 한다는 기본 명제 안에서 대응해야 한다. 어느 정부가 들어서도 한미동맹은 우리 외교의 기본 축이기 때문이다.

일본을 비롯한 우방국들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거듭된 양보를 통해 한일관계를 개선하려던 윤석열정부의 대일외교는 일본의 소극적 태도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국내적 비판에 직면하게 됐다. 뉴라이트 인사들이 중용되어 독립운동가들을 폄하하고 일제를 찬양하는 발언이 나온 것도 대일외교에 대한 비판여론을 부추겼다. 그러나 뉴라이트 문제는 국내 문제로 대일외교와는 엄연히 구분돼야 한다. 국내 문제를 외교에 연계시킴으로써 대일외교를 그르칠 수는 없다. 대행체제는 이제 대일외교도 “일본의 마음이 중요하다”는 식의 저자세를 버리고 일본과 긴밀한 협력 체제를 유지해나가되 비판할 문제는 비판하는 방식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오늘의 외교활동이 훗날 부끄럽지 않도록

사실 한일 양국은 트럼프정부가 출범한 새로운 국제정치 환경에서 미중갈등과 북핵문제, 북러 밀착 등 많은 도전에 직면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함께 대처해야 할 필요가 커졌다. 윤석열정부도 최근에 초기와는 달리 중국과 실용적 협력을 모색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대행체제도 그러한 기조를 유지하면서 중국과의 관계를 관리해야 할 것이다. 최근 탄핵반대 진영에서 나오는 중국의 선거 개입 등의 가짜뉴스에 대해서는 외교 문제로 비화하지 않도록 신속하고 세심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1987년처럼 호헌과 개헌을 연달아 홍보하면서 가졌던 자괴감은 필자 세대로서 족하다. 오늘날의 젊은 외교관들이 대행체제의 지침 아래 외교활동을 수행한 것을 먼 훗날 부끄럽게 회고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외교 책임자들은 오로지 민주주의 회복에 기여하고 한국 외교의 품격을 지킴으로써 계엄이 가져온 이 어려운 시기를 현명하게 극복해 나가기를 바란다.

조 현 전 유엔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