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범의 한반도 워치

최악의 안보위기, 실용주의적 리더십이 필요하다

2025-02-11 13:00:12 게재

한국국제정치학회 차기회장

시인 김춘수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했다. 누군가를 불러준다는 것은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해 준다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그의 정체성을 들춰내기도 한다. 그러나 개념적 정의라고 하는 이러한 활동은 사실 처음 그 개념을 만든 ‘창시자’의 의도와는 다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이념도 그렇다. 사실 진보와 보수의 개념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현상과 사고를 분류하는 하나의 관념적 기준에 불과하다. 보수라 함은 기존의 사회적 질서를 보존하는 데에 기여하는 일체의 행위를 의미하고 진보라 함은 반대로 이러한 기존의 질서를 바꾸고자 하는 시도와 노력을 이르는 단어이다. 어느 사회나 보수와 진보는 존재하고 현재의 선진국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보수와 진보 모두의 활동과 기여가 있었다.

보수와 진보의 긴장이 사회발전 조건

어느 사회나 지속적 발전을 위해서는 보수와 진보가 건강한 긴장상태를 유지하면서 적절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역사는 진보의 편이다. 다만, 이러한 진보가 안정적이고 평화적으로 이루어지느냐 급격하고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서 이루어지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보수는 역사의 진보가 평화롭고 온건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안전판과 같은 역할을 한다.

현재 한국 사회의 불행은 바로 이러한 사회 현상을 해석하는 분류 체계인 보수와 진보가 사전적 의미로 쓰이지 않고 있는 데서 기인한다. 보수와 진보가 사회적 현상을 해석하는 용어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의 정체성과 행동 지침이 되어 버렸다. 보수와 진보가 과거 행위에 대한 사후적 해석으로서가 아니라 미래 행동에 대한 지침으로서 작동하고 있다.

스스로를 보수주의자나 진보주의자로 칭하면서 정서적으로 자신을 특정 진영에 가두고 해당 진영에서 행하는 모든 행위를 정당화하는 반면 상대 진영을 악마화하면서 사실을 왜곡하고 폭력을 주저하지 않는다. 서부지법 난동 사건은 이러한 현상의 전형적 사례다.

그 누구보다 사회의 기존 질서를 수호하는 데 헌신해야 할 자칭 보수주의자들이 기존 체제의 최후 보루라고 할 수 있는 법원을 침탈한 행위는 그 위법성을 넘어서 거의 정신분열에 가깝다. 이들의 행동은 보수주의와 거리가 멀다.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극단주의의 모습에 가깝다.

보수와 진보는 기존 체제의 기본적 틀 속에서 경쟁한다는 점에서 극단주의와 구별된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다. 기존 체제의 전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극우와 극좌는 통한다. 과거 문제해결의 수단으로 사회운동을 추구했던 운동권과 달리 현재의 극단주의자들은 행위의 합리화와 정치적 목표로 이념을 앞세운다. 가히 이념의 과잉과 오남용의 시대라 할 수 있다.

외교안보의 영역에도 이념의 과잉과 오남용이 심각한 수준이다. 과거 국제관계에서 보수와 진보는 패권국의 영향력에 대한 수용성과 시장경제 체제에 대한 입장을 기준으로 분류되었다. 정부 기능의 최소화와 자유시장 경제체제에 대한 수용성이 크고 패권국에 대한 순응적 태도를 보이는 집단을 소위 보수주의로 분류하였고 그 반대의 집단은 패권국이 주도하는 기존 질서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보완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진보주의로 분류하였다.

실제로 영국과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질서가 급속히 확장하는 과정에서 선진국과 후진국의 관계 고착화, 개도국 미성년자들의 노동착취, 급속한 산업화로 인한 기후위기 등 수많은 문제가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을 불러왔다. 특히, 자유주의적 성장과 분배에 대한 논란은 보수와 진보의 핵심적 대척점이었다.

문제해결과 멀어진 극단적 이념 갈등

다만, 이러한 대립은 어떤 방식이 모두를 이롭게 하는 최선의 방법인가를 둘러싼 생산적 논쟁이었다. 이러한 논쟁의 결과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도 자유로운 시장의 경쟁을 중시하는 정책과 기본적인 소득과 사회보장을 중시하는 정책들이 번갈아가며 상호보완적으로 작동하여 문제를 해결해왔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달랐지만 한미동맹이나 남북문제에 대한 갈등도 결국은 국가주권의 수호와 민족문제 해결을 위한 효과적인 방안을 두고 벌어진 논쟁이었다. 결국, 진영 간의 논쟁이 있었지만 그 자체가 문제해결 지향적이었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최근 벌어지고 있는 한국 사회의 진영 간 논쟁은 이러한 문제해결 지향과는 심각하게 동떨어져 있다. 문제해결 방식에 대한 사후적 해석으로 보수와 진보가 언급되는 것이 아니라 보수와 진보 자체가 행동 지침이 되어버렸다.

스스로를 보수와 진보로 사전에 규정하고 퇴로를 차단해 버린 양 진영 간의 대립은 사활을 건 전쟁이 되어버렸다. 무엇이 국익에 부합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상대 진영을 악마화하고 제거하는 데 필요하다면 그 내용이 현상유지든 현상타파든 상관하지 않는다.

지금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환경은 한국전쟁 이후 최악이다. 10여년 전만 하더라도 한반도 주변환경은 비교적 한국에 우호적이었다. 신자유주의적 개방경제 속에서 미중일러 등 주변국 모두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급속한 성장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현재 혈맹인 미국은 동맹을 거래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고, 최대 교역국 중국과는 미중 전략경쟁과 공급망 문제로 전면적 협력이 요원한 상황이다.

일본과 러시아와의 관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 북한 문제에 대해서도 러시아가 북러 상호방위조약을 통해 군사동맹의 길로 나아가고 있고 트럼프는 북한을 핵국가로 지칭하고 있다.

경제적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미국의 공급망 압력으로 우리의 대중 경제협력이 급격히 제한되고 있고 한국 경제의 핵심인 반도체와 배터리, 자동차 산업의 경쟁력도 약화되고 있다. 반국민적인 친위쿠데타로 잠정 경제성장률도 1%대로 떨어진 상황이다.

트럼프는 전세계에 일반관세 10% 부과를 공언하고 있고 이웃 캐나다와 멕시코에도 고율관세를 빌미로 외교적 압력을 넣고 있다. 아마 한국도 그 시기가 미뤄지고 있을 뿐 머지않아 방위비 분담금, 관세, 주한미군 유지, 대중 수출규제 등 버거운 외교적 과제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국제관계 패러다임의 격변과 미증유의 외교안보 위기 속에서 한가하게 보수나 진보를 논하고 있을 여유가 없다. 보수이기 때문에 무조건 미국의 요구를 수용할 수도 없고 진보이기 때문에 북한문제를 우선할 수도 없다.

북한문제는 이미 신뢰의 상실로 보수나 진보 어느 진영도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접어들었고 일본과의 관계도 이념을 빌미로 무조건적인 친일이나 반일로 나아가서는 안 되는 상황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좌측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도 해야 하는 지경이다. 그만큼 한반도의 주변환경이 심상치 않다. 오직 국익만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이념을 넘어선 실용적 리더십 필요

보수와 진보라는 개념 자체가 상대적이다. 그것이 정치적 지향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치지도자는 자신의 정치 신념을 실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변화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국가와 국민의 이익을 위해 과감히 그것을 내려놓는 용기도 필요하다. 그래야 정치가가 아닌 정치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보수이기 때문에 반북을 외쳐야 하는 것도 아니고 진보이기 때문에 반일을 주장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북한문제는 노태우정부의 북방정책으로, 일본문제는 김대중정부의 김대중-오부치선언을 통해서 가장 잘 풀었던 경험을 살려볼 필요가 있다. 진보진영의 지도자가 한미동맹과 한미일 협력을 가장 잘할 수 있고 보수진영의 지도자가 북한문제를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