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트럼프 미스터리’와 ‘오바마-바이든 패러독스’
‘오바마-바이든 패러독스’와 ‘트럼프 미스터리’. 미국 정치를 속 깊게 이해하는 데 필요한 키워드가 아닐까 싶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었던 버락 오바마정부(2009~2017) 시절 미국 흑인들의 삶이 최악을 치달았다. 경제가 바닥으로 추락했던 탓이다. 오바마 이전 60년 동안 3.4%를 기록했던 미국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그가 집권한 8년간 1.47%로 뚝 떨어졌다. 일자리와 국민소득 감소의 피해는 흑인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저소득층에 집중됐다. 오바마의 러닝메이트 출신 조 바이든정부(2021~2025) 시절엔 치솟는 물가로 인해 흑인과 히스패닉 등 취약계층이 직격탄을 맞았다.
그 반대 현상을 ‘트럼프 미스터리’로 부를 수 있다. ‘백인 우월주의자’ 소리를 들은 도널드 트럼프 1기 정부(2017~2021) 시절 흑인들의 삶은 역대 최고수준으로 향상됐다. 흑인들의 빈곤율이 2차세계대전 이후 처음 20% 밑으로 떨어졌고, 흑인 실업률도 1972년 이후 처음 6% 아래로 하락했다. 임금 수준도 흑인들이 다수인 저숙련·저학력 계층이 중·상류층보다 더 크게 올라 계층 간 소득격차가 좁혀졌다.
규제개혁 정책 차이가 저숙련·저학력층 삶과 직결
트럼프가 흑인들의 삶을 살뜰하게 챙긴 덕분이 아니다. 그는 ‘사회적 약자’들에 관해 직접적인 공약을 내놓은 바 없다. 다른 두 대통령은 달랐다. 오바마는 약자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주겠다며 “우린 더 잘할 수 있다(We can do better)”를 강조했고, 바이든은 ‘더 나은 재건(Build-back better)’을 간판 구호로 내걸었다. 그런데도 정반대 결과를 낸 이유는 ‘정책의 차이’다.
오바마는 약자 보호를 내세워 산업 전반에 걸쳐 각종 규제를 늘리고 국가 개입 강도를 높였다. 의욕을 잃은 기업들이 투자를 줄였고, 일자리가 급감하면서 취약계층에 파장이 집중됐다. 바이든정부는 ‘친환경’ 일변도의 규제 정책을 고집해 에너지가격을 끌어올리는 등 물가관리에 실패해 미국인들의 일상생활을 주름지게 했다. 그 결과가 두 차례의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이변’을 일으킨 것이다. 트럼프가 승리한 두 번의 선거에서 각각 흑인과 히스패닉의 지지율이 역대 최고수준을 기록한 게 대표적 방증이다. 온갖 기행과 괴벽으로 역대 미국 대통령 가운데 가장 ‘비(非)호감’ 평가를 받고 있음에도 그가 두 번이나 승리를 거둔 요인으로 개인적 흠결을 상쇄하는 ‘정책’이 꼽히는 이유다.
트럼프는 1기 선거에서 기업들이 충분한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게끔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을 회복시키겠다며 대대적인 규제 완화를 약속했고 저학력·저소득층의 삶을 개선했다. 2기 선거에서도 “바이든 행정부에서 도입된 292개 경제규제를 전면 재검토하고 수천개의 규제를 무효화 하겠다”는 공약으로 미국인들의 기대를 불러 모았다.
미국 유권자들이 선택한 ‘규제개혁’은 유럽과 중남미, 아시아의 거의 대부분 나라에서 새로운 흐름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영국의 진보성향 주간지 디 이코노미스트가 2월1일자 커버스토리로 ‘규제에 대한 반란(The revolt against regulation)’을 제목삼아 세계 각국에서 일기 시작한 규제개혁 열풍을 상세하게 다룬 배경이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회원국 기업들의 사업관련 신고의무 건수를 25%, 중소기업들에 대해서는 35%까지 줄일 것”이라는 규제혁파 계획을 지난달 29일 발표했고, 프랑스의 프랑수아 바이루 총리는 “탈(脫)관료주의를 향해 강하게 시동을 걸 것”이라며 강도 높은 ‘규제와의 전쟁’을 예고했다. 뉴질랜드는 시민들로부터 정부의 규제관련 행태를 신고 받아 개혁해나갈 ‘규제관리부’를 지난해 신설했고, 사회주의 국가 베트남에서조차 “정부기관의 25%를 폐지할 것”이라는 내용의 규제개혁 정책을 공표했다.
한국 정치지도자들은 이런 국제정세 챙기고 있는지
전통적으로 ‘큰 정부’를 지향해 온 유럽 국가들을 비롯한 각국에서 규제개혁 붐이 일고 있는 것은 최근 몇몇 국가들에서 그 효과가 강력하게 확인되고 있어서다. 10여년 전 재정위기로 휘청대며 ‘유럽의 천덕꾸러기’로 취급받았던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등 남유럽 국가들이 강력한 규제개혁을 통한 기업 활성화정책으로 성장궤도를 되찾았다. 아르헨티나도 자유주의 경제학자 출신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의 시장개혁 조치에 힘입어 환율과 물가가 안정되는 등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이 같은 ‘국제정세’를 제대로 챙기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학영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