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현장 리포트
소수자 인권확대 역사 거꾸로 돌리는 트럼프정부
2월 13일 미국 국립공원관리청(NPS)은 성소수자 운동을 기념하는 스톤월 국립기념물(Stonewall National Monument) 웹사이트에서 ‘트랜스젠더’라는 단어를 모두 삭제했다. 스톤월 기념물 소개 글은 원래 다음과 같이 시작되었다. “1960년대 전에는 공개적으로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퀴어 (LGBTQ+)로 살아가는 것이 거의 모두 불법이었다.”
그러나 2월 13일 오후 아무런 예고도 없이 ‘트랜스젠더’와 이의 알파벳 약자인 ‘T’가 모든 문장에서 삭제되었고 몇시간 후에는 ‘퀴어’와 ‘Q+’도 웹사이트에서 삭제되었다. 성소수자 커뮤니티 내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반영하는 단어인 LGBTQ+(레스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퀴어)는 트랜스젠더와 퀴어가 삭제된 ‘LGB’로 모두 바뀌었다.
이는 트럼프정부가 취임 첫날 발표한 생물학적 남성과 여성 외 다른 성정체성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행정명령에 따라 취해진 조치로 보인다.
스톤월 항쟁 선두에 섰던 성소수자들
잘 알려져 있듯이 스톤월 항쟁은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분수령이 된 역사적 사건이다.
1969년 6월 28일 뉴욕시 그리니치 빌리지 지역 크리스토퍼가(街)에 위치한 스톤월 인(Stonewall Inn)이라는 게이바에 평소처럼 경찰이 급습했다. 하지만 이날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당시 만연해 있던 공권력의 차별과 경찰의 상습적인 폭력을 당해 오던 성소수자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경찰에 맞섰고, 이렇게 시작된 항쟁은 사흘 동안 계속 이어졌다.
이 항쟁에서 생물학적 남성이 여성 복장을 했다는 이유로 특히 경찰의 집중 공격의 대상이 되어 온 트랜스젠더와 드래그퀸 등이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날 밤 경찰 폭력에 저항해 항쟁의 불을 댕긴 것도, 그리고 사흘 동안 항쟁을 이끈 마샤 존슨과 실비아 리베라도 모두 트랜스젠더 여성이었다.
1970년 스톤월 항쟁 1주년을 기념해 다시 모인 사람들이 성소수자 해방의 날(Gay Liberation Day) 행진을 한 것이 최초의 성소수자 프라이드 행진이었다. 이후 전세계 곳곳에서 해마다 6월이면 스톤월 항쟁을 기념해 퀴어퍼레이드가 벌어지고 있다. 2016년 당시 오바마정부는 항쟁이 시작된 스톤월 주점과 그 앞 크리스토퍼 공원을 포함한 그리니치 빌리지 일대 거리 7.7에이커를 국립기념물로 지정했다. 이로써 스톤월은 성소수자 운동과 역사를 기념하는 미국 최초의 국립기념물이 되었다.
항쟁 50주년인 지난 2019년 뉴욕경찰은 1969년 당시 경찰의 ‘스톤월 인 급습’을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라며 공식 사과 했다. 공권력의 성소수자 차별과 억압을 뒤늦게나마 인정하고 사과한 것이다.
트랜스젠더 권리 박탈하는 행정명령 속출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스톤월 국립기념물 웹사이트에서 ‘트랜스젠더’를 삭제한 것은 특히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다음날인 2월 14일 1000여명이 넘는 뉴요커들이 스톤월 인 앞 크리스토퍼 공원에 모여 항의시위를 벌였다. 일부 시위대는 “T 없이는 스톤월 역사(Stonewall History)를 제대로 쓸 수 없다”고 적힌 팻말을 들고 나왔고, 사람들은 단어를 지운다고 트랜스젠더와 퀴어 성소수자들의 존재 자체가 지워질 수 없다고 한목소리로 외쳤다.
스톤월항쟁 기념단체는 성명서에서 “스톤월은 트랜스젠더의 역사이고, 그들의 용기와 희생, 리더십은 우리가 현대 성소수자권리 운동의 기초로 기념하는 저항의 핵심이었다”고 하면서 이 노골적인 삭제 행위는 역사의 진실을 왜곡할 뿐 아니라 스톤월 항쟁과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최선두에서 싸워 온 수많은 트랜스젠더 성소수자들의 막대한 기여를 불명예스럽게 하는 것이라고 성토했다. 스톤월 인의 현 공동 소유주인 스테이시 렌츠는 인터뷰에서 “트랜스젠더들이 아니었다면 프라이드 행진도, 스톤월 봉기도 없었을 것이다”고 말했다.
정치인들도 이런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는 스톤월 국립기념물에서 트랜스젠더를 삭제하려는 것은 “잔인하고 한심하며 역사적으로 부정확하다”고 비판했고, 호철 뉴욕주지사 또한 소셜미디어를 통해 “트랜스젠더들은 LGBTQ+ 권리를 위한 싸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뉴욕은 그들의 기여가 삭제되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정부는 출범 후 이민자 추방뿐 아니라 트랜스젠더 권리를 공격하는 행정명령을 계속 발표하고 있다. 취임 첫날인 1월 20일 발표한 ‘젠더 이데올로기 극단주의로부터 여성을 보호하고 생물학적 진실을 회복하기’라는 제목의 행정명령에서 미국정부는 생물학적 남성과 여성만을 인정한다고 선언했다. 이 두 성별 외의 다른 성정체성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이어 나온 트랜스젠더 군복무 금지, 19세 미만 미성년자의 성별확정 의료서비스(gender-affirming care) 금지, 성중립 화장실 금지, 트랜스젠더 여학생의 여성 스포츠 참가 금지, 트랜스젠더 학생에 대한 교사와 학교의 지원을 범죄화하고, 연방교도소에 구금 중인 트랜스젠더 여성 약 1500명을 남성과 함께 수용하도록 하는 등 취임 후 한달이 채 되지 않은 짧은 기간 동안 지난 수십년에 걸쳐 많은 이들의 피와 땀으로 일궈낸 소수자 인권 확대라는 역사적인 진전을 되돌리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에 반대하는 각종 소송이 이어지면서 행정명령의 대부분이 당장 실현되지는 못하고 있지만 이번 경우처럼 연방정부 곳곳의 웹사이트와 공식 문건에서 트랜스젠더 존재 지우기는 계속되고 있다. 또다른 예를 들면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경우 트랜스젠더 청소년들의 높은 자살율과 의료 지원, HIV 예방과 치료 가이드, 그리고 기타 성 정체성 관련 공중보건 정보들을 웹사이트에서 통째로 삭제했다.
이를 저지하려는 소송이 시작되어 지난 주 연방법원 판사가 공중보건 정보 데이터를 복원하라고 명령하면서 일부 내용들이 다시 올라왔지만 다음과 같은 웃지 못할 경고 문구가 같이 실려 있다. “이 페이지의 ‘젠더 이데올로기’를 홍보하는 모든 정보는 매우 부정확하며 남성과 여성, 두 가지 성별이 있다는 불변의 생물학적 현실과 단절되어 있다.”
존재가 지워질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이런 변화는 앞으로 다가올 더 위험한 일들의 빙산의 일각이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인권운동가들은 ‘트랜스젠더’라는 단어를 삭제하는 상징적인 조치는 특정 계층 전체를 말살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라면서, 혐오세력들이 트랜스젠더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공격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면 우리들 모두가 다음 희생자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경고한다.
미성년자에게 성전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의료기관에 대한 연방기금 지원을 중단하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명령이 차별금지법 위반이라는 소송에서 볼티모어 연방법원은 원고의 요청을 받아들여 행정명령을 임시적으로 막았다. 이 법원 브랜든 허슨 판사는 트랜스젠더 성소수자들이 사회적 편견과 차별로 높은 자살율과 빈곤 등에 시달리고 있는 취약계층이라는 것을 지적하면서 이들에 대한 갑작스러운 의료서비스 중단은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불러올 수 있다고 했다.
허슨 판사는 이어 “행정명령은 이들이 존재하거나 존재할 자격이 있다는 사실조차 부정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어떠한 선언이나 명령, 행정조치도 인간의 존재 자체를 지울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보아왔다. 2월 14일은 발렌타인데이였다. 이날 트랜스젠더 혐오에 반대해 시위에 나선 뉴요커들은 트랜스젠더도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결코 지워질 수 없는 존엄한 인간이라는 사랑의 메시지를 온몸으로 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