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벼랑 끝에 선 ‘K경제 드라마’
“이게 현재 우리의 실력이다.” 최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의 한마디가 대한민국을 ‘현타(현실자각 타임)’로 이끌었다. 올해 우리나라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1.9%에서 1.5%로 끌어내린 뒤 한 말이다. 내년 성장률도 1.8%에 머물며 2년 연속 1%대 성장을 면치 못할 것으로 예상하면서 “1%대 저성장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경제실력”이라고 했다. 틀린 말이라고 할 수 없다. 2023년 1.4%로까지 곤두박질했던 성장률이 지난해 가까스로 2%에 턱걸이하고는 다시 1%대로 주저앉고 있으니 말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3만7000달러를 넘어서며 선진국에 진입한 만큼 1%대 성장을 ‘나쁘지 않은 수준’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경제덩치가 한국보다 15배나 더 큰 미국은 2023년(2.9%)과 작년(2.8%) 두 해 연속 3% 가까운 성장을 기록했고, 올해도 2.7% 성장(국제통화기금 전망)을 바라보고 있다. 미국만 그런 게 아니다. 인구(4800만 명)나 국민소득(3만7000달러)이 한국과 거의 비슷한 스페인도 지난해 3.1% 성장했고, 올해는 2.5% 성장을 내다보고 있다.
한국경제 1%대 낮은 성장률 추락으로 벼랑 끝에 섰다는 경고음
전 세계가 극찬한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며 고도성장을 질주했던 대한민국이 어쩌다가 1%대의 낮은 성장을 ‘실력’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나라가 됐는가. 이창용 총재는 ‘신산업 부재와 지지부진한 노동생산성’을 주요 원인으로 짚었다. ‘신산업 부재’가 특히 뼈아프다. 20년 전인 2005년과 작년의 대한민국 10대 수출품목을 비교해보면 그 현실이 단박에 드러난다. 반도체, 자동차, 자동차부품, 석유제품, 석유화학, 철강 등 8개 품목이 그대로다. 디스플레이와 가전제품이 컴퓨터와 영상기기를 제치고 ‘톱10’에 들어왔지만 성숙산업들이다.
20년 전 1,2위 품목이었던 반도체와 자동차가 아직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정도로 한국 산업계의 ‘고인 물’ 현상이 심각하다. 한국 성장세가 작년 하반기 이후 꺾였고, 올해 더욱 부진할 것으로 예상되는 데는 반도체의 돌연한 수출부진 탓이 크다. 이 분야 세계 1위를 달렸던 삼성전자가 인공지능(AI)에 들어가는 첨단반도체 경쟁에서 밀린 여파가 경제 전반에 큰 주름살을 끼치고 있다.
미국은 다르다. ‘반도체 원조기업’ 인텔 역시 변화의 흐름에 부응하지 못해 몰락 위기에 빠졌지만 그 자리를 엔비디아 같은 신흥 기업들이 더 큰 실적으로 메우고 있다. 미국 경제를 이끄는 시가총액 상위 10개 기업 가운데 애플 엔비디아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알파벳(구글) 메타(페이스북) 테슬라 브로드컴 등 8곳이 세계 최첨단 산업을 선도하는 ‘빅테크’ 기업들이고 그 중 6곳은 1990년대 이후 탄생했다.
이 총재가 ‘대한민국 경제실력 저하’의 두 번째 요인으로 꼽은 낮은 생산성도 ‘고인 물’ 산업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집계한 한국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51달러(2023년 기준)로 37개 회원국들 가운데 26위였다. 한국의 1.6배인 미국(83.6달러)은커녕 ‘늙은 대륙’ 소리를 듣는 유럽연합(EU)의 회원국 평균(72.9달러)에도 20달러 넘게 뒤졌다. 한국의 노동생산성이 낮은 까닭은 노동자들이 게을러서가 아니다. 부가가치가 낮은 산업과 영세기업들이 연명을 지속하면서 생산성을 짓누르고 있는 탓이다.
낡은 산업구조 깨부수고 새살 돋게 하는 과감한 구조개혁 시급
낡은 산업구조를 깨부수고 새살을 돋게 하는 과감한 구조개혁이 시급한 이유다. 이 총재를 비롯한 경제전문가들 상당수가 오래 전부터 이 문제를 지적해왔지만 정치권에서 제대로 귀담아 듣지 않았다. 이유는 단 하나, “창조적 파괴가 필요하고 누군가는 고통을 받아야 하는데, 그에 따른 사회적인 갈등을 꺼려서 이것저것 다 피해 온 탓”이다. 국회가 ‘타다’ 같은 토착 승차 공유 서비스를 “기존 사업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며 싹을 잘라버린 게 단적인 예다. “한국경제는 이제 갈림길이 아닌 벼랑 끝에 서 있다”는 경고음이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