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훈 칼럼
아버지의 권위와 지혜의 무게
넉달간 한뎃잠을 자며 희대의 광인이자 광대를 권좌에서 끌어냈다. 그는 줄곧 국민을 위해 일해 왔노라 우기지만 동의할 수 없다. 말로는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외친 그가 실상 보여준 모습은 폭군 아버지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지난 한세기 동안 너무나 급한 사상체제 변환을 겪은 탓인지 공화국의 대통령이란 상 위에 온 백성의 아버지인 왕이란 개념이 덧씌워진 ‘국부’라는 이상적 지도자상이 의식 저변에 깔려있는 것 같다. 대통령의 몰락은 그 자신과 추종자들이 그리던 국부상에 큰 오류가 있었다는 점을 강하게 시사한다. 일그러진 자아를 가진 아버지가 가장인 집안이 얼마나 처참해지는지 우리는 직간접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대한민국은 ‘잘 살아보자’는 일관된 목표 속에 다른 가치관에 대한 고민을 덮어둔 채 지난 80년을 살아왔지만 이제 일본을 능가하는 국민소득을 달성했으니 잘 사는 것 외에도 다른 고민을 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필자는 한동안 몰두한 연구과제를 끝내고 다음 주제를 시작하기 전 책상 위에 쌓인 논문을 정리하는 습관이 있다. 우리나라도 새로운 국가 지도자 선발이란 큰 숙제와 맞물려 국가적인 차원의 책상정리가 필요한 때다.
필자가 새내기 교수가 되자 “이제 교수도 됐으니 열심히 해서 학장도 되고 총장도 되라”는 덕담을 들었다. 교수는 대학이란 조직의 말단 직원이니 앞으로 승진을 거듭해 더 좋은 자리로 올라가란 뜻이었다. 지난 수십년 간 수많은 지인들이 사회 각층에서 더 높은 자리로 신분의 사다리를 밟아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회에서는 그가 가졌던 최종지위가 곧 그의 정체성을 결정한다는 것도 뒤늦게 알았다. ‘자리’가 곧 성취이고, 누군가에게 주어지는 찬사는 그가 올라갔던 자리의 최종값에 비례한다는 점도 확인했다. 대통령까지 됐으니 그의 인격과 능력엔 뭔가 한방이 있을거란 믿음 역시 우리 사회가 신봉하는 가치체계의 일부였다.
물리학 세계에선 질문과 응답능력이 권위
자리에는 그에 상응하는 권력이 뒤따르고 권력은 종종 그 사람의 권위와 동일시된다. 판사 검사에게 주어진 남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권력은 개인의 권위와는 무관하게 국가가 잠시 빌려준 합법적 폭력이지만 그 사실은 종종 잊혀지고 판검사 개인이 갖는 권위로 인정받곤 했다. 그나마 이번 탄핵 과정에서 드러난 그들의 민낯 덕분에 이런 환상은 조금 희석되었을 것이다.
사랑을 상징하는 보편적인 단어가 ‘어머니’라면 권위를 상징하는 보편적인 단어는 ‘아버지’다. 권력을 가진 사람을 아버지처럼 떠받드는 의식체계 때문인지 잘못을 저지른 권력자에게 정정당당히 그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주장을 하면 생물학적 아버지의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패륜으로 오해받기 쉽다. 생물학적 아버지와 권력의 상징적 아버지는 엄연히 다른데 그 두가지를 혼동한다.
아버지의 권위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물리학자의 세계에서 권위는 질문하고 답을 할 줄 아는 능력에서 나온다. 하버드대학교 물리학과에는 할퍼린이란 80대 중반의 이론 물리학자가 있다. 노벨상을 뺀 거의 모든 상을 수상한 인물이다. 그에게는 명성에 걸맞는 권위가 있을까. 할퍼린 교수는 손자뻘 연구원들과 점심식사나 오후 다과를 같이 하며 그들의 질문에 답을 해주곤 한다. 경험과 지식과 지성이 잘 버무려진 답변이 입에서 청산유수로 흘러나오는 모습은 마치 선지자의 그것과 같았다. 그에게 물리학적 통찰의 세례를 받은 젊은이들은 누가 시키기 않아도 그와 닮고 싶어한다.
진정한 권위는 직함의 무게가 아니라 말과 지혜의 무게로 구분된다. 또한 그 지혜의 무게는 매일같이 도전자를 상대로 진검승부를 벌이는 과정에서 검증받고 재검증받는다. 지식이나 지성의 가치는 결국 문제 해결 능력에 있고 그런 능력이 없는 자는 정신적 아버지 자격이 없다.
수억 인구가 아버지라고 칭하는 교황의 서거와 후임 교황 선발을 둘러싼 이야기를 다룬 영화 ‘콘클라베’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수년 동안 교회에 봉사해오면서 제가 무엇보다 두려워하게 된 죄는 확신입니다. 확신은 통합의 강력한 적이며 포용의 치명적인 적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살아있는 까닭은 정확히 의심과 손을 잡고 걷기 때문입니다. 의심하는 교황을 보내주십사 주님께 기도합시다. 죄를 짓고 용서를 구하고 실천하는 교황을 주시기를.” 의심과 손을 잡고 걸을 수 있는 자가 진정한 아버지다.
아버지란 무엇인가. 권위의 상징이지만 그 권위는 할퍼린식으로 실전을 통해 검증받은 실력의 다른 말이다.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해서 주어진 권위라면 그건 아버지가 아니라 ‘어버이 수령님에 대한 복종’이고 그 뒤엔 말 안 들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는 폭력이 도사리고 있다. 김장하 채현국 같은 훌륭한 아버지를 배출한 지역에서 어버이 수령님같은 국부를 추앙하는 것은 역설적이다.
젊음 위해 봉사하는 아버지가 되고 싶다
지난 2월에 미국 물리학회를 다녀왔다. 마침 디즈니랜드가 있는 LA 부근 애너하임에서 열린 학회였다. 참석자들의 대다수는 연구에 대한 열정이 막 불타오르는 20대 젊은이들이었다. 20년 만에 참석한 물리학회에서 새삼 사무치게 깨달은 점은 ‘젊음’이 내뿜는 어마어마한 잠재력과 그 가능성에서 비롯된 아름다움이었다.
50대 중반을 넘어선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보람된 일은 이런 젊음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란 결론이 마땅한 공리 체계로 다가왔다. 젊은이에게 검증받고 그들에게 봉사하는 아버지가 되고 싶다.
한정훈 성균관대학교 교수, 물리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