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산책

우주에서 준 선물 해썹(HACCP)

2025-04-15 13:00:03 게재

우주라는 극한 환경은 인류에게 수많은 도전을 안겨준다. 특히 우주인들의 신체는 지구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게 된다. 이에 따라 우주식량 개발은 단순한 영양 공급을 넘어 우주인의 건강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오늘날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식품안전관리 시스템인 해썹(HACCP, Hazard Analysis Critical Control Point)이 바로 이 우주식품 개발 과정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이다.

우주의 무중력 환경은 우주인의 몸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무중력 환경에서는 하체 근육량이 20~30% 감소하며, 특히 종아리와 대퇴사두근에서 가장 두드러진 위축이 일어난다. 골밀도 역시 매월 1~2%씩 감소해 장기 미션 우주인들은 귀환 시 심각한 골다공증 위험에 노출된다. 또한 체액은 상반신으로 이동해 소위 ‘머리 큰 개구리 증후군(Facial Puffy Syndrome)’을 유발한다. 심혈관계에도 심박수가 10~15% 감소하고 적혈구 생성이 억제되어 전반적인 순환계 기능이 저하된다.

소화기능과 대사활동에도 변화가 일어난다. 무중력 상태에서는 위에서 아래로 음식을 밀어내는 연동운동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우주인의 소화기능이 약화된다. 위장 운동성이 약 40% 감소해 음식물의 소화와 이동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따라서 영양흡수율도 저하되어 개인차가 있으나 칼슘 흡수는 50%, 철분 흡수는 30%까지 감소한다. 코막힘에 따라 미각 또한 둔화된다.

대사활동에서는 기초대사량이 10~15% 증가하고, 단백질 분해가 활발해져 질소 배출량이 30%나 상승한다. 수분 대사에도 이상이 생겨 칼슘 배출이 증가하면서 신장결석의 위험이 높아진다.

우주식량 안전성 기준에서 글로벌 표준으로

초기 우주 미션에 쓰인 우주식량은 단순한 튜브형 음식과 동결건조 식품이 주를 이루었다. 1960년대 머큐리와 제미니 프로그램에서 우주인들은 기본적인 영양소만 공급받는 단조로운 식사를 했다. 아폴로 프로그램에 이르러서야 다양한 식품이 도입되기 시작했고, 스카이랩과 우주왕복선 시대에는 우주식품의 질과 다양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국제우주정거장(ISS) 시대에 들어선 지금 우주식품은 안전성과 영양 균형을 고려한 6대 핵심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미세중력 환경에서 부스러기가 없어야 하고, 18개월 이상 저장이 가능해야 하며, 높은 에너지 밀도(1g당 4kcal 이상)를 유지해야 한다. 또한 골밀도 유지를 위한 비타민 D와 K를 강화하고, 소화가 용이하도록 섬유소 함량을 조절하며, 포장에서 가스방출이 없어야 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오늘날 전세계 식품안전 관리의 표준이 된 HACCP 시스템이 바로 우주식품 개발 과정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이다. 1960년대 나사(NASA)와 미국의 식품 회사 필스버리(Pillsbury)는 우주인들에게 100% 안전한 식품을 제공하기 위해 협력했다. 당시까지의 품질 관리 방식으로는 최종 제품 검사만으로 완전한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식품생산의 모든 단계에서 위해요소를 분석하고 이물질이나 미생물이 들어갈 가능성이 있는 ‘중요관리점(Critical Control Points)’을 설정하는 예방적 접근법인 HACCP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 시스템은 우주 프로그램에서 성공적으로 적용된 후 1971년 미국 식품산업에 처음 소개되었고 이후 전세계로 확산되었다. 한국에서는 1995년 HACCP 제도가 도입된 이후 점진적으로 확대되어 왔다. 어린이 기호식품, 영유아식, 국민 다소비 식품 등 21개 식품군에 의무적용을 실시하고 있다. 특히 어묵류 냉동수산식품 유가공품 김치류 도시락 즉석조리식품 등이 주요 의무적용 대상이며, 연간 매출액과 종업원 수에 따라 단계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인류의 도전정신과 혁신기술의 산물

앞으로 화성탐사와 같은 장기 우주 미션이 계획됨에 따라 우주식량은 더욱 진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NASA와 여러 우주기관들은 우주에서의 식량 자급자족을 위한 우주 농업기술을 개발하고 있으며, 3D 프린팅 기술을 활용한 맞춤형 우주식품 제조 방법도 연구 중이다. 이러한 우주식품 기술의 발전은 지구에서의 식품 안전과 영양 문제 해결에도 지속적으로 기여할 것이다.

우주공간에서의 인체 변화와 이에 대응하는 식품기술의 발전 과정은 인류의 도전정신과 혁신이 어떻게 우리 일상의 안전을 향상하는지 보여주는 완벽한 사례다.

HACCP처럼 극한의 환경에서 탄생한 기술이 전 인류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이바지하는 모습은 우주 탐험의 숨겨진 혜택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우리는 모두 어떤 의미에서 ‘우주식품’을 먹고 있는 셈이다.

김기명

푸도슨트식품연구소장

식품공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