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뉴노멀’ 통상전쟁시대에 대비해야
81억 인구가 모여 사는 지구촌이 단 한 사람의 말 한마디에 울었다 웃었다 하는 게 정상일 리 없는데,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주 크게 곤두박질쳤던 세계 주요 증권시장이 돌연 급등세로 돌아서는 ‘롤러코스터’ 장세를 보였다. 중국의 베이징과 홍콩, 두 곳 증권시장을 빼고는 거의 모든 곳이 다 그랬다. 원인은 단 하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전 세계를 상대로 ‘관세전쟁’을 선포하고는 고삐를 죄었다 풀었다 한 탓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일 70여곳 주요 교역국가에 대해 기본관세 10%에 더해 10~84%의 상호관세를 추가 부과한다고 선언하고는 이날을 ‘해방절(liberation day)’이라고 이름 붙였다. “불공정한 세계 각국의 무역공세로부터 미국을 해방시키겠다”는 억지 작명이다. 한국에는 25%의 관세를 추가했다. 미국과 일찌감치 자유무역협정(FTA)을 맺고 대부분 무(無) 관세로 교역을 해왔는데도 “한국이 미국보다 4배 높은 관세장벽을 쌓아 올리고 있다”는 황당한 주장을 했다.
트럼프의 죄었다 풀었다 ‘관세폭격’에 글로벌 금융시장 ‘롤러코스터’ 장세
이런 식으로 나라마다 ‘아니면 말고’ 식의 근거를 대며 ‘관세폭격’을 한 결과 한자릿수에 머물러 온 세계 무역시장 평균 관세율이 단번에 30%대로 올라서게 됐다. 전 세계가 ‘너 죽고 나만 살자’는 중상주의에 갇혀 있던 1800년대 수준으로 순간이동하게 된 것이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표현대로 “트럼프라는 20세기 인물이 21세기의 미국과 전 세계를 순식간에 19세기로 되돌려놓았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랬던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9일 갑자기 “중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의 상호관세 적용을 90일간 유예한다”고 선언했다. 2일 ‘해방절’을 선포한 직후부터 “어떻게 하면 관세를 물리지 않거나 확 낮출 거냐”를 타진하는 각국 정부의 협상요청이 쇄도했다는 게 이유였다. 단 한 나라, 중국에 대해서만은 상호관세율을 145%로 오히려 더 끌어올렸다. “끝까지 싸우겠다”며 보복관세로 맞섰기 때문이다. 중국정부의 태도는 아직 단호하다. 자국 증시가 미국 발 ‘관세쇼크’로 꺾이지 않도록 국내 기관투자가들을 총동원했고, 덕분에 다른 증시들이 폭락할 때도 유일하게 주가를 떠받치는 데 성공했다.
중국이 버티는 데는 나름의 계산이 있다. 무엇보다도 거대한 소비시장에서 나오는 ‘힘’이다. 단적으로 세계 최대 전기자동차회사인 미국 테슬라는 매출의 20%를 중국시장에서 거두고 있다. 중국정부가 보복조치를 본격화할 경우 가뜩이나 경영난에 빠진 테슬라가 결정타를 맞게 되고 그 여파가 미국 기업들 전반에 미칠 파장은 엄청날 게 분명하다. 또 트럼프의 지지기반인 미국 농민들의 중국시장 의존도가 높다는 점을 겨냥, 콩과 옥수수 등 주요 작물의 수입을 금지하는 ‘핀셋 보복’과 함께 미국 기업들이 중국과의 교역에서 흑자를 누리고 있는 경영자문과 법률서비스 등을 중단시키겠다는 으름장도 흘리고 있다.
중국이 이런 대응으로 끝까지 맞설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분명한 건 그나마 중국 외에는 다른 어떤 나라도 미국과 ‘맞짱’을 뜰만 한 수단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미국 최대 동맹국가인 영국을 비롯해 한국과 일본 등이 미국정부의 막무가내 공세에 정면 대응하는 대신 ‘협상’을 타진하고 나선 배경이다.
이런 가운데 한 가지 주목되는 점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겉으로는 강공 일변도에 나서면서도 한편으로는 각국별로 협상을 제안하는 등 공세에 ‘속도 조절’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에 대해서도 지난 8일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먼저 ‘협상을 위한 통화회담’을 제안해 성사시켰다고 스스로 공개했다. 관세 외에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등을 한데 묶어서 협상하는 ‘패키지 딜’ 가능성을 내비치면서다. 방위비 대폭 증액에 더해 거액 투자가 필요한 알래스카 LNG(액화천연가스) 개발 프로젝트에 한국 기업들이 총대를 메고 참여하도록 압박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일본 및 유럽 국가들과도 비슷한 협상경로를 밟고 있다.
뉴노멀 ‘트럼프식 협상법’ 앞에 한국 정치권 오직 국익수호에 매진해야
원하는 것을 최대한 얻기 위해 상대방에게 먼저 무지막지한 엄포를 놓은 뒤 협상을 통해 실타래를 풀어가는 ‘트럼프 식 협상법’이 앞으로 국제사회, 특히 글로벌 통상 분야에서 ‘뉴노멀(새로운 표준)’로 작동할 것임을 요란스레 예고한 셈이다. 19세기 영국의 명(名) 재상 파머스턴경은 “우리에게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 오직 영원한 국익만이 있을 뿐이다”는 어록을 남겼다. 새 대통령 선출을 앞둔 한국의 정치권은 물론 국민 모두가 새겨야 할 말이다.
이학영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