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혁신, 골든타임이 지나고 있다

2025-04-16 13:00:02 게재

농업소멸 재촉하는 고령화 … 농업 시스템 전반에 근본적 재설계 필요

한국이 다시 한번 세계인의 주목을 끌었다. 이번에는 케이팝의 환호성이 아니라 ‘인구 붕괴’라는 경고음이다. 독일 과학 콘텐츠 채널 쿠르츠게작트(Kurzgesagt)는 한국의 저출산 고령화 문제를 다룬 영상에서 “한국 사회 전체가 무너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기후변화로 농작물 생육과 작황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2024년 2월 8일 충남 논산시 딸기 농장을 방문해 지능형농장(스마트팜) 솔루션 농업인과 기업인을 만나 현장 애로사항을 청취하고 있다. 사진 농림축산식품부 제공

인구붕괴의 최전선 '농촌'

이 거대한 위기의 최전선에는 농촌이, 그리고 우리 농업이 있다. 특히 농업 인구의 고령화는 더욱 심각해 농장 경영주의 평균 연령은 68세다. 65세 이상이 67%다. 이제는 ‘이대로 한국 농업은 지속가능한가?’라는 질문을 정면으로 던져야 할 때다.

한국은 식량자급률이 OECD 최하위권이면서 농식품 물가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농업 예산과 연구개발(R&D) 투자 비중은 결코 적지 않지만, 농업 경쟁력에 대한 평가는 박하다. 농민은 “제값 못 받아 살기 어렵다”고 하소연하고, 소비자는 “비싸고 먹을 것도 없다”고 불만이다.

러시아 야쿠츠크의 슈퍼마켓에는 혹한 속에서도 다양한 품종의 사과가 진열되어 있고, 라오스의 과일 가게에서도 다채로운 사과를 저렴하게 구할 수 있다. 두곳 모두 사과를 재배하지 못하는 지역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부사 외 품종은 찾아보기 어렵고 가격마저 비싸다. 표면적으로는 식물검역이라는 비관세 장벽이 수입을 제한하는 듯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특정 품종에 편중된 국내 생산 구조와 경직된 유통 시스템, 소비자 선택권을 넓히려는 노력 부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일본은 양배추조차 칼륨 함량을 분석해 최적의 맛일 때 수확하지만 우리는 고춧가루의 매운맛조차 제대로 표기하지 못한다. 고비용-저품질-선택제한의 악순환 속에서 농민과 소비자 모두 만족하지 못하는 역설적인 상황이다.

일본의 ‘레이와 쌀 소동’은 고령화와 소비 감소라는 난제 속에서 일본 농업이 찾은 활로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1970년대부터 쌀 감산 정책을 펴왔지만 그것만으로는 쇠퇴를 막을 수 없었다. 일본은 이제 내수 대신 ‘쌀 수출’에서 돌파구를 찾고 있다. 오랫동안 추진해 온 경영체 규모화와 농지 집적화를 통해 생산비를 절반 이하로 낮춘 것이 기반이 되었다. 2030년까지 쌀 수출량을 35만톤으로 늘린다는 목표는 식량 위기 시 대응할 수 있는 완충력까지 확보하게 해준다.

반면 우리나라는 규모화의 경제적 효과에 대한 면밀한 분석조차 부족하다. 오히려 현행 직불금 제도 등은 소농 중심 구조를 유지·강화하는 측면이 있어 규모화를 통한 생산성 향상과 경쟁력 강화를 가로막고 있다. 일본의 사례는 내수 감소와 고령화라는 동일한 문제 앞에서 낡은 틀에 갇혀 있을 것인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할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예산은 충분하다, 문제는 방향이다

농업계는 늘 “예산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어떨까? 2024년 한국 농식품 예산 약 18.7조원은 일본(약 22조원)보다 적지만 경지면적은 일본의 1/3 수준이다. 면적당 투입 예산은 오히려 한국이 2배 많다. EU의 공동농업정책(CAP) 예산(약 73조원)은 한국의 4배지만 경지면적은 100배, 곡물 생산량은 75배다. 단순히 예산 규모의 문제가 아님은 분명하다.

문제는 ‘얼마를 쓰느냐’보다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이다. 농가는 99만으로 줄었지만 농업 관련 공공기관 인력은 오히려 늘어나 비효율을 키우고 있다. 예산 역시 미래를 위한 농업인프라 투자보다는 단기적인 보조금 지급이나 현상 유지에 치우치는 경향이 짙다. 기존의 방식을 반복하면서 변화된 현실에 대응할 수는 없다.

종자를 반도체에 비유하며 미래 산업으로 육성하겠다는 야심찬 계획 아래 R&D 예산 1조원 이상이 투입되었지만 성과는 초라하다. 규모가 큰 식량 종자는 정부 주도, 민간은 정부 지원에 의존하는 영세 기업만 양산했다. 정부가 로열티 프리 종자를 보급하는 상황에서 민간 기업의 R&D 투자는 동력을 잃었다. 이 틈을 스마트팜이 메우는 듯 보였다. 7년간 4000억원의 R&D 예산과 후속 사업이 이어졌지만 성과는 중동 진출 뉴스에서 멈추었다.

한국 스마트팜의 경쟁력은 값싼 농업용 전기와 풍부한 정부 지원이라는 ‘온실’ 속에서 연명해왔다. 그러나 농업용 전기요금 인상(2021년 ㎾/h당 46원 → 2023년 75원)은 이 구조의 취약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이로 인해 농업계는 연간 6000억원의 추가 부담을 지게 됐지만 이는 여전히 산업용 요금의 절반 수준이다. 만약 산업용 요금이 적용된다면 추가 부담은 1조5000억원에 달해 전기요금만 농업 부가가치의 10%에 육박한다. 규모화나 에너지 자립 등 근본적인 대안없이 선진 사례를 따라하는 혁신이 얼마나 허약한지 여실히 드러냈다.

농업은 더 이상 예측 가능한 산업이 아니다. 기후변화는 특히 영세한 고령농에게 치명적이다. 이미 수익 기반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기후 적응을 위한 과감한 시설 투자는 언감생심이다. 기후변화는 농업의 기존 취약성을 더욱 증폭시키며 ‘기후플레이션’이라는 새로운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세계 최고가 농지, 혁신의 발목을 잡다

한국 농지는 세계에서 가장 비싸다. EU 최고가인 네덜란드보다 3배 이상이다. 이 살인적인 농지 가격은 청년 농업인의 진입을 막고 규모화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가장 큰 구조적 장벽이다. 농지를 담보로 생계를 유지하는 기존 농가와 규모화를 통해 미래를 열어야 하는 농업 현실 사이의 딜레마는 풀기 어려운 숙제다.

청년농 지원이나 농지 비축 정책으로 가격을 붙잡고 있지만 한계는 명확하다. 높은 농지 가격은 필연적으로 1ha 미만 고령 소농(전체의 73%) 중심의 영세한 구조를 만들었다. 5ha 이상 규모화된 농가는 3.5%에 불과하다. 그나마 이 통계조차 음성적인 임차농 확산으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솔직히 한국 농업이 어떤 상태인지 모른다는 게 정확한 진단이다. 이 불확실성은 효과적인 정책 설계마저 가로막고 있다.

우리 농업이 직면한 문제는 명확하다. 대안도 제시된다. 하지만 근본적인 인식 전환 없이는 ‘선한 의도, 나쁜 결과’의 방정식을 피하기 어렵다. 우리는 여전히 20세기 자급자족 시대의 유물인 ‘농가(農家)’ 단위로 통계를 내고 정책을 입안한다. 현대 상업 농업의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이 낡은 개념은 농업을 ‘가업’의 틀에 가두고 전문적인 ‘경영체’로의 발전을 저해한다. 이런 통계를 만드는 나라는 이제 찾기 어렵지만 우리는 문제 인식조차 못하고 있다. 그러니 여전히 ‘농가 수 늘리기’라는 시대착오적 목표에 매달린다.

‘농가 수 늘리기’ 대신 ‘전문 농업 경영체 육성’으로 정책 목표를 전환해야 한다. 청년들이 바로 창업에 뛰어드는 대신 전문 농업법인 등에서 노동자로 농업 기술과 경영을 배우며 경력을 쌓고, 이후 독립하거나 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단계적 성장 경로’를 만들어야 한다. 정부는 청년에게 안정적인 농촌 주거 지원을, 법인에는 고용 및 교육 훈련 지원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이를 뒷받침할 수 있을 것이다. 농가 수라는 낡은 지표에만 얽매이지 않는다면 가능하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한국 농업이 버텨온 것은 기적이지만 그 방식은 이제 한계에 도달했다. 구조 개편 없이 소농 중심 체제를 유지하며 식탁의 안정을 지탱해 온 것은 수많은 농민의 헌신과 희생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 방식은 지속 불가능하다. 지금이 구조를 바꿀 수 있는 마지막 골든타임이다.

고령화는 농업 소멸을 재촉하고, 기후변화는 예측 불가능성을 키우며, 시장과 정책은 실패를 반복하고, 값비싼 농지와 낡은 제도는 혁신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 모든 문제가 얽혀 한국 농업의 지속가능성을 근본적으로 위협하고 있다. 부분적인 땜질 처방으로는 어림없다. 농지 제도, 예산 구조, R&D 방향, 공공 조직, 농정 철학까지 농업 시스템 전반에 걸친 근본적인 재설계가 필요하다.

이는 단순히 농민만을 위한 과제가 아니다. 국가 식량 안보, 기후 위기 시대의 생태적 지속가능성, 지역 공동체 유지라는 국가적 명운이 걸린 문제다. 우리는 지금 그 마지막 기회를 흘려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질문은 이제 이것이다. “이대로 가라앉게 둘 것인가, 구조적으로 바꿀 것인가.”

남재작

한국정밀농업연구소 소장

농특위 탄소중립위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