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억의 영국 톺아보기

선진국 경쟁적 해외원조 삭감, 가중된 글로벌 안보불안

2025-04-17 13:00:07 게재

미국이 해외원조의 하나로 청년들을 외국으로 보냈던 평화봉사단(Peace Corps)은 1961년 3월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민주적 가치를 확산하기 위해 만들었다. 청년들을 영어 교사로 보내 단지 경제와 군사력만 앞선 게 아니라 문화도 우수하다는 점을 알리고자 했다. 그런데 미국의 이런 소프트파워 프로그램이 거의 사라진다. 트럼프 대통령이 출범한 후 해외원조를 난도질했기 때문이다.

이런 해외원조 삭감은 서방선진 7개국 가운데 영국에서 먼저 시작됐다. 독일도 원조 축소를 논의 중이다. 원조 줄이기는 아프리카 등의 빈곤을 더 악화시켜 글로벌 안보 불안을 가중할 듯하다. 또 중국이 미국의 빈 틈새를 메우려 할 것이다.

영국이 먼저 시작한 해외원조 삭감

보리스 존슨은 2016년 6월 23일 영국의 유럽연합탈퇴(브렉시트) 국민투표에서 탈퇴 운동을 주도했다. 이런 덕에 2019년 7월 총리가 된 존슨은 해외원조를 30% 정도 줄였다. 탈퇴 국민투표 후 정치적 불확실성이 지속되자 영국에 대한 외국인들의 해외직접투자(FDI)는 감소했고 경제는 저성장을 계속했다. 이런 와중에 존슨은 각 분야의 예산을 줄이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유권자들의 반발이 거의 없는 해외원조(공적개발원조, ODA)에 손을 댔다.

2021년 7월 존슨은 해외원조 예산을 국민총소득(GNI)의 0.7%에서 0.2%p 삭감했다. 유엔은 원조 공여국에게 GNI의 0.7%를 해외원조로 지출하라고 권고한다. 노르웨이와 스웨덴, 독일 등 유럽의 일부 국가들만 이 권고를 준수해 왔는데 영국은 2015년 법을 제정해 이를 의무화했다. 전임 보수당정부가 만든 이 법을 후임자 존슨이 불과 6년 만에 허물어버렸다.

그런데 이 예산이 또 줄었다. 키어 스타머 노동당 총리는 2월 말 국내총소득의 0.5%인 해외원조 예산을 0.3%로 줄인다고 밝혔다. 2027년까지 영국은 국방비를 현재 GDP의 2.2%에서 2.5%까지 증액하려 한다. 트럼프의 재집권 후 미국은 유럽의 안보를 스스로 책임지라고 요구해왔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후 안보 위협을 느낀 데다가 트럼프가 유럽의 안전보장을 약화하자 영국을 비롯한 독일 등 유럽 각국이 대규모 국방비 증액을 이행중이다. 국방비 증액 때문에 다시 공적개발원조가 희생양이 됐다.

노동당은 보수당보다 해외원조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확대하려 했으나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정부의 돈주머니는 크기가 정해졌는데 ‘총’을 추가 구입하면 당연히 ‘버터’, 즉 복지를 줄일 수밖에 없다. 미국에 이어 세계 2번째 공여국 독일조차 ODA 삭감을 논의중이다.

2월 23일 치러진 독일 조기 총선에서 제1당이 된 중도우파 기독민주당·기독사회당은 중도좌파 사회민주당과 연립정부 구성 협상을 지속해 지난 9일 마무리했다. 협상중에 기민당·기사당 일각에서 해외원조 예산 삭감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독일은 연방정부의 순부채가 GDP의 0.35%를 넘지 않게 규정한 기본법(헌법)의 균형재정 조항을 지난달 말 개정했다. 앞으로 10년간 인프라 투자에 5000억유로(약 750조원), 국방비 증액에도 이 정도를 지출한다. 새로 구성될 연정은 무엇보다 다른 정책 분야의 예산 지출을 재조정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ODA 삭감이 거론됐다.

물론 사민당은 해외원조 줄이기에 반대한다. 하지만 사민당은 연정 구성의 전제로 균형재정 조항 개정을 어렵게 얻어냈기에 ODA 예산 삭감 반대가 연정 협상을 매듭짓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정부 출범 후 실제 예산 조정 과정에서 독일도 해외원조 예산을 줄일 가능성이 있다. 2023년 독일은 367억달러의 해외원조를 시행해 미국(660억달러)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ODA를 국민총소득의 규모로 볼 때 미국은 0.24%에 불과했으나 독일은 0.79%를 기록했다.

물론 독일이 원조를 삭감해도 유럽연합(EU) 27개 회원국과 경제정치블록 EU가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의 원조 제공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EU 회원국들은 경제력에 비례한 공적개발원조 예산을 별도로 조성한다. 회원국들을 대표해 행정부 역할을 수행하는 EU 집행위원회가 회원국들의 원조와 별개로 ODA를 시행해왔다.

2023년을 기준으로 EU 회원국들과 EU의 개발원조 총액은 1038억달러로 전세계 ODA의 42%를 차지해, 미국보다 12%p 높다. 2월 말 EU 집행위원회의 원조 담당 하자 라비브(Hadja Lahbib) 집행위원은 “미국이 원조를 대폭 삭감했지만 EU 차원에서 원조를 증액해 미국과는 차별화된 유럽연합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 해외개발처 직원 1만명에서 10명으로

남미 콜롬비아에서 마약 단속을 맡는 헬기용 연료, 수년간 내전중인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의 200만명이 넘는 피란민들에게 주는 식량,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후천성면역결핍증(AIDS, 에이즈) 환자들이 무료로 지원받는 치료의 공통점은?

모두 다 미국의 ODA 지원 비중이 큰 프로그램이다. 트럼프의 원조 중단으로 이런 일이 멈췄다. 콜롬비아에서 마약 단속이 느슨해지면 미국으로 흘러들어가는 마약이 급증한다. 콩고민주공화국의 피란민들이 굶주리게 되면 반군들이 피란민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쳐 반군으로 넘어오는 피란민들이 급증한다. 그럼 이곳의 분쟁은 더 격화한다. 이처럼 ODA 지원 중단은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뿐만 아니라 글로벌 안보 약화와도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세계화 시대에 지구촌이라는 말을 자주 썼다. 세계 각국은 무역과 상호 방문으로 연계돼 있다. 이윤 최대화가 목표인 기업들이 주주뿐만이 아니라 고객과 직원, 협력업체, 지역사회 등에도 관심을 갖고 이윤의 일정 비율을 이런 곳에 투자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다.

마찬가지로 지구촌 시대 국가들도 세계에 대한 책임(National World Responsibility, NWR)을 진다. 미국이나 독일, 영국 등이 번창하게 된 것은 세계 각국과 교류하고 무역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들도 세계의 분쟁을 줄이고 빈국을 도와줘야 한다. 도덕적 의무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이유에서다.

미 해외원조를 담당해오던 해외개발처(USAID)의 인력은 1만여명에서 불과 10명 정도로 줄었다. 정부효율부의 일론 머스크가 칼을 들이댔다. 트럼프 2기 동안 해외원조 현장에서 미국이 거의 보이지 않을 것이다.

지난달 28일 미얀마에서 규모 7.7의 강진이 발생했다. 미국 USAID는 보통 24시간 안에 대규모 재난 현장에 인력을 파견했다. 그러나 이번 미얀마 강진 현장에는 5일이 지나도록 미국의 지원팀이 없었다. 중국과 러시아는 곧바로 긴급 수색대를 파견하고 지진 발생 이틀 후부터 현장에서 수색을 개시했다. 미국의 부재가 현실이 됐다.

미국 포기한 해외원조 리더십 중국이 장악

위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국이 스스로 포기한 해외원조의 리더십을 중국이 행사할 수 있다는 분석도 조심스럽게 나온다. 2차대전 후 자국이 구축한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를 앞장서 파괴중인 미국과 다르게 중국은 기존 미국 중심의 국제 질서를 비판해왔다. 하지만 중국은 트럼프의 파괴를 지켜보며 자국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최대한 투사하려 한다.

중국은 수원국의 입장에서 벗어나 2013년에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그러나 중국은 아프리카에 대규모 투자를 했음에도 많은 공사 현장에 현지인보다 자국인을 더 고용했다. 이 때문에 중국은 경제개발에 도움이 안된다는 현지 국가의 불만을 들어야 했고 신식민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미국의 빈틈을 노린 중국의 글로벌 ODA 리더십 장악 노력은 지속될 듯하다.

안병억

대구대 교수

안쌤의 유로톡 제작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