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석 칼럼
각자도생 시대, 에너지 안보가 우선이다
지난 3월 미국 휴스턴에서 열렸던 2025 세라위크(CERAWeek) 행사에 다녀왔습니다. CERAWeek는 미국의 S&P 글로벌이 매년 개최하는 에너지 컨퍼런스입니다.
우리에게는 '2030 에너지 전쟁' '뉴맵' 등의 저서로 잘 알려진 다니엘 예긴(Daniel Yergin)이 전체 회의를 이끌어가고 있었습니다. 전세계 1만명 이상의 에너지 업계 리더, 정책 결정자, 투자자, 기술 전문가들이 모여 글로벌 에너지 산업의 미래를 논의했습니다.
올해 회의는 ‘에너지 산업의 현재와 미래를 조망하다’라는 주제 아래 에너지 안보, 공급확대, 기후변화 대응, 기술혁신과 지정학적 도전 과제를 중심으로 진행됐습니다. 전력 수요 급증과 천연가스가 주도하는 에너지 세계를 중심으로 많은 논의가 있었습니다. 이 외에도 다양한 에너지 관련 발표와 토론이 있었는데 흥미로웠던 것은 전력 수요가 급증하면서 어떤 에너지로 전력을 공급할 것인가를 다투는 전원 믹스 논쟁의 변한 모습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에너지 전환이라는 화두를 두고 전력원 간에 치열하게 다투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게 모든 전력원이 각자의 노력으로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해야 한다는 결론에 쉽게 도달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에너지 전환보다는 에너지 안보가 더 중요한 시대정신이 되었음을 절감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작년 5월부터 미국은 러시아산 농축 우라늄의 미국 수입을 금지하는 법안(Prohibiting Russian Uranium Import Act)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상업용 원자로에서 사용하는 농축 우라늄의 20% 정도를 러시아에서 수입하는 미국으로서는 자국 경제에 미치는 피해를 감수하면서 러시아의 자금줄을 차단하기 위한 정책을 채택한 것입니다.
시대정신으로 떠오른 ‘에너지 안보’
러시아는 전세계 원자력 발전소에서 연료로 사용하는 농축 우라늄의 40% 정도를 생산하는 나라입니다. 러시아에서 상당량의 농축 우라늄을 수입하는 우리나라도 러시아산 우라늄 수입에 문제가 생기면 정상적인 원자력 발전이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세계화의 시대가 가고 각자도생의 시대가 오면 에너지 안보에도 심각한 도전이 온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원자력 발전이 전력 생산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우리로서는 국제 사회의 동향을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합니다. 2차세계대전의 패전국인 일본은 핵무기의 피해 당사국임에도 불구하고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다각도의 외교적 노력의 결과로 지금은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핵연료를 재처리할 수 있는 나라로 국제 사회의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세계 6위의 원자력 발전소 보유 국가인 우리는 발전소의 연료로 쓰이는 농축 우라늄을 전량 해외로부터 수입해야 하며, 재처리 여부에 대해서는 국가 정책도 수립되지 않았고 국제 사회의 인정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원자력 연료의 안정적인 공급은 교역이 자유롭던 세계화의 시대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국가적 과제로 삼고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대한민국은 원자력을 평화적으로만 이용할 것이라는 국제 사회의 신뢰를 하루라도 빨리 얻어내야 합니다. 이러한 신뢰가 있어야만 우라늄 농축이나 파이로프로세싱 등의 재처리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지난 3월 고준위 방사성폐기물관리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고 제정 공포되었습니다. 법률안이 통과된 후 원자력계 일부에서는 법률 내용 중 폐기물 시설 용량이 발전소 설계수명 내 발생량으로 한정된 점, 사용후핵연료의 원전 본부 간 이동을 제한한 점 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환경단체에서는 이 법이 원자력 발전을 과도하게 보호하고 있음을 들어 법안 자체에 대해 반대하는 분도 계십니다.
오랜 기간 여야가 논의하여 국회를 통과한 소중한 법률을 현실로 인정하고 이를 토대로 미래를 만들어 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생각의 차이를 존중하고 상대방의 입장도 받아들여야만 대화와 타협이 이루어집니다.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오는 방사성폐기물의 안전한 처분이 없이는 원자력 발전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 또한 원자력 발전의 비중은 전력 계통의 유연한 운영을 고려하면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발씩 양보해 원전 지상주의도 아니고 탈원전도 아닌 적정 수준의 포용적 원전 정책을 마련함으로써 미래의 에너지 안보를 준비해야 할 시점입니다.
포용적 원전정책 마련할 시점
이제 원자력 발전의 연료인 농축 우라늄은 가격이 아니라 수급이 문제가 되는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석유 가스 자원개발에 못지않게 원자력 연료의 안정적 확보가 시급한 시대적 과제입니다.
농축 우라늄의 확보, 파이로프로세싱 등 원전 연료 재처리 기술의 확보,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 등을 통해 에너지 안보의 기틀을 세워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각자도생은 에너지 안보에서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