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전주의 미술은 국가권력과 민중계몽의 도구였다

2025-05-08 16:10:13 게재

정광균의 80일간 유럽미술관 산책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 모던미술과 명작 이야기 (9)

필자는 지난해 여름 ‘나홀로 자유여행’으로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80일간의 유럽미술 여행’을 다녀왔다. 유럽 12개국의 주요 미술관과 거장들의 개별미술관 순례 경험을 독자들과 공유하면서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 모던 미술과 명작이야기’를 미술사적 인문학적 견지에서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는 15세기 이후 르네상스, 매너리즘 미술에 이어 17~18세기 바로크, 로코코 미술을 살펴보았다. 중세의 붕괴로 신 중심의 미술은 인간중심의 르네상스 미술로 전환되었으며 종교개혁과 대서양 시대는 유럽의 세력 판도와 미술의 지형을 바꿔놓았다. 구교국가이면서 르네상스를 꽃피운 이탈리아, 대항해시대 해상강국인 스페인, 절대왕정 국가인 프랑스, 신교국가이면서 신흥 해상강국인 네덜란드는 각국이 처한 상황에 따라 교황, 국왕, 귀족, 시민 계급 중심의 미술을 구현했다. 미술은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이제 18~19세기 2개의 대혁명인 프랑스대혁명, 산업혁명은 유럽의 전반적인 변화를 불러왔고 이 시기에 나타난 3개의 미술사조인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는 이성, 감성, 현실이라는 본질을 강조하면서 근대미술의 지평을 확대했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나타난 신고전주의 미술부터 살펴본다.

신고전주의(Neo-Classicism) 미술은 말 그대로 ‘새로운 고전주의’ 미술이다. 즉, 새로운 각도에서 고대 그리스·로마 미술의 이상과 양식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미술 사조였다. 루이 15세 시기 귀족 중심의 향락, 사치, 감각적인 로코코 미술(전편 게재)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성, 질서, 도덕과 공공성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왕정에서 근대사회로 넘어가는 혼돈기는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미술이 중첩되면서 발전한 관계로 그 생명력은 길지 않았다. 본격적으로는 루이 16세 말기에 형성되어 1789년 프랑스대혁명 이후 나폴레옹 집권 시기에 꽃피웠으며 계몽주의 사상과 맞물리면서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까지 유행했다. 그 과정에서 로마유적의 발견, 책, 여행은 기폭제가 된다.

첫째는 AD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사라진 이탈리아 고대도시 폼페이, 헤르쿨라네움 유적의 발견이다. 이는 그리스·로마 시대가 이성적이며 질서정연한 이상세계라는 믿음을 주었다. 둘째는 독일의 미술사가 요한 빙켈만이 발간한 책, ‘고대 미술의 역사, 1764’이다. 이는 그리스·로마 미술의 재조명을 통해 그리스 고전미술의 이상미를 증명했다. 셋째는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의 귀족, 명문자제들 사이에 유행했던 그랜드 투어(Grand Tour)다. 이는 젊은 세대들에게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의 체험을 통해 이성, 절제, 영웅적 삶이 중요하다는 가치관을 심어주었다.

이렇게 신고전주의 미술의 롤모델이 된 그리스·로마 미술은 르네상스 미술 이후 300여년 만에 재차 소환되었다. 요즘 말로 하면 고전미술 시즌 3이다. 그러나 그리스·로마 미술의 단순한 차용이 아닌 재해석이었다. 이제 유럽은 근세를 넘어 근대사회로의 전환기에 들어섰으며 신고전주의 미술은 로코코 미술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났기에 그 목적이 달랐다. 그렇다. 루이 16세 말기는 몰락하는 ‘절대왕권의 수호’를 위해,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구체제)이 붕괴한 혁명기와 나폴레옹 제정 시기는 ‘국가권력의 수호’와 ‘민중계몽’을 위한 미술이 요구된 것이다.

권력의 상징적 수단인 예술, 권력의 시녀 역할을 한 미술

프랑스 신고전주의 미술의 배경과 특징은 어떠한가? 18세기 후반의 프랑스는 지각변동 수준의 격변기였다. 루이 16세 말기에서 프랑스대혁명 이후의 정치체제는 공화정, 왕정복고, 제정으로 엎치락뒤치락했다. 혁명가, 부르봉왕조, 나폴레옹이 그리는 국가의 미래상은 달랐으나 꿈꾸는 이상은 고대 로마의 공화정이었다. 그러나 프랑스대혁명의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공화정과 왕정복고는 단명으로 끝나고 나폴레옹의 제정 시기(1804~1815)가 대신했다. 나폴레옹은 한마디로 혁명의 계승자가 아닌 종결자였다. 결국 신고전주의 미술은 루이 16세 말기와 나폴레옹 시기가 중심이 된다. 왜 그런가? 루이 16세는 ‘세습 군주(왕)’고 나폴레옹은 ‘국민투표에 의한 군주(황제)’지만 모두 절대권력이고 몰락 직전의 루이 16세보다 나폴레옹 황제의 권력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신고전주의 미술은 나폴레옹 시기에 꽃을 피운 것이다.

두 권력은 무엇보다 권력의 수호, 정통성, 민중의 지지 확보가 절실했다. 이를 위해 정치적 선전 수단이 필요했으며 이의 상징적 수단은 예술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수요와 계몽주의 사상은 시대의 흐름과 맞아떨어졌다. 이상미를 구현한 ‘그리스 고전미술’과 이를 모방하고 공공의 미학을 실현한 로마의 제국 미술은 국가이념의 상징적 수단이 되었으며 미술은 국가가 양성한 엘리트 미술가들에 의해 권력의 시녀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신고전주의 미술은 고전 미학(이성, 질서, 도덕)과 양식(균형, 조화, 절제 - 엄격한 구조, 뚜렷한 선, 절제된 색채 등)을 재해석하고 그 위에 서사(공화정의 이상, 영웅 이야기 등)를 덧입히는 미술을 추구하게 되었다.

신고전주의 미술은 엘리트 화가 양성제도의 산물

개선문(사진 1)
개선문(사진 1)

필자는 지난해 여름 6~8월 사이 각각 다른 시기에 파리의 루브르박물관, 로마의 바티칸 미술관, 브뤼셀의 왕립미술관, 런던의 내셔널갤러리 등을 방문하며 신고전주의 미술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둘러본 결과 신고전주의 미술은 건축, 회화가 중심이었다.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 끝에서 만나는 개선문(사진 1)은 나폴레옹이 아우스터리츠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선문을 본떠 지은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의 진수다.

나폴레옹이 로마제국의 계승자이며 프랑스제국의 영광을 상징화한 문이다. 개선문-샹젤리제–콩코르드광장-튈르리 정원-루브르로 이어지는 황제의 행렬 길(Voie Triomphale)은 제국의 질서와 권력을 시각적으로 상징화한 길이다. 파리가 개선문을 중심으로 방사형 도시가 된 것은 나폴레옹 3세(1853~1870) 시기 파리 대개조 사업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개선문 인근의 나폴레옹이 대관식을 가진 노트르담 성당, 나폴레옹 관이 안치된 앵발리드, 나폴레옹이 군인들의 신전으로 세운 마들렌 사원(교회), 센강 위의 가장 화려한 퐁 알렉상드르 3세 다리 등의 명소를 둘러보다 보면 파리가 근대 국가의 권력을 어떻게 시각화했는지를 체감할 수 있다.

프랑스대혁명 직후 1793년에 루브르 궁전은 국립미술관으로 바뀌면서 왕의 미술관은 국민의 미술관이 되었다. 국가권력과 민중이 직접 만나는 예술공간이 된 것이다. 루브르박물관의 드농관에 가면 신고전주의 명작과 다비드의 ‘나폴레옹의 대관식’, 앵그르의 ‘루이13세의 서약’ 등의 대형걸작을 만나게 된다. 두 거장은 국가 최고의 예술 장학제도인 로마 대상 수상자로서 로마의 파리 아카데미에서 수학 후 루이 16세와 나폴레옹 제정의 궁정화가로서 신고전주의 미술을 주도했다. 이는 루이 14세 시기에 설립한 왕립 미술 아카데미-로마 대상-로마의 프랑스 아카데미 수학(3~5년) 제도에 따른 특혜였다. 다비드, 앵그르는 바로 이러한 제도하에 양성된 엘리트 화가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로마에서 고전미술을 배운 후 파리로 돌아와서는 국가권력이 원하는 방향대로 신고전주의 미술을 주도하게 된 것이다.

‘마라의 죽음’은 프랑스 혁명기의 정치적 선전화

프랑스 신고전주의 미술의 대표적인 거장은 자크 루이 다비드,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앙투안 장 그를, 피에르 비네, 안토니오 카노바(조각가) 등이다. 그 가운데 다비드(1748~ 1825)는 예술가, 혁명가, 망명가로서 영광과 몰락의 삶을 살았기에 특별하다. 그는 엘리트 화가로서 혁명기 국민공회와 나폴레옹 시기는 선전 화가로 승승장구하였으나 나폴레옹 몰락 이후는 브뤼셀에서 망명 화가로 살다 그곳에서 사망했다. 예술과 정치의 경계인이었던 다비드는 루이 16세 말기는 프랑스 혁명 직전에 조국을 위한 희생을 강조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1784)’, ‘소크라테스의 죽음(1787)’, 혁명기는 ‘마라의 죽음(1793)’, 나폴레옹 시기는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1803)’, ‘나폴레옹의 대관식(1805~1807)’ 등의 명작을 남겼다.

마라의 죽음(그림 1)
마라의 죽음(그림 1)

먼저 벨기에 왕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마라의 죽음(그림 1)’이다. 혁명기 급진파인 자코뱅파의 핵심 인물인 장폴 마라가 욕조에서 글을 쓰던 중 폭력혁명에 반대하는 지롱드파의 젊은 여성에게 살해된 사건을 그린 것이다. 극적이면서도 절제된 구도, 선명한 유곽선, 차분한 색조, 고요하고 절제된 감정표현은 신고전주의적 특징이다. 그림에서 마라의 얼굴은 고통이나 두려움 없이 평화롭고 죽은 모습은 피에타(성모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처럼 고요하다. 마치 성화를 패러디한 것 같다.

다비드가 친구이며 정치적 동지였던 마라의 죽음을 혁명의 순교자, 민중의 구세주로 이상화한 것이다. 마라의 손에 쥐어진 편지와 펜은 혁명정권의 정당성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시민정신의 상징이다. 다비드가 사고 현장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억과 마라 부인이 제공한 자료를 토대로 그린 상상화지만 실제처럼 느껴진다. 대단한 상상력과 창조력이다. 다비드는 마라의 죽음을 단순히 재현한 것이 아니라 고전 미학과 민중계몽을 결합한 정치적 선전화를 그린 것이다.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은 나폴레옹의 선전용 초상화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그림 2)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그림 2)

다음은 베르사유궁전이 소장하고 있는 다비드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그림 2)’이다. 원작 이름은 ‘생베르나르 고개를 넘는 나폴레옹’으로 1800년 봄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군을 기습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진격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림에서 안정된 삼각형 구도, 말, 나폴레옹, 망토의 균형적 비례, 분명한 윤곽선, 정제된 이상미는 신고전주의 양식이다. 말 위에 위풍당당하게 올라탄 나폴레옹의 얼굴은 절제된 감정을,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오른손이 전방 하늘을 가리키는 모습은 지도자의 위용을, 험준한 설산의 암석에 한니발, 샤를마뉴(Karolvs Magnus)와 함께 새겨놓은 보나파르트는 나폴레옹이 그들과 동급의 위대한 정복자임을, 앞발을 들고 포효하는 말은 영웅의 용맹성을 말해준다.

그러나 실제로 나폴레옹은 말이 아닌 노새(스페인산 종마)를 타고 조심스럽게 알프스를 넘었으며 다비드에게 “민중은 상상 속의 자신을 더 사랑한다”라면서 실제와 다른 그림을 주문했다고 한다. 사진이 없던 시대에 선전용 초상화지만 명작은 명작이다. 다비드는 현실보다는 이상, 역사보다는 상징, 인간보다는 신화 속의 나폴레옹을 그린 것이다. 이렇게 다비드의 두 그림은 혁명기와 나폴레옹 시기에 다비드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말해준다. 그렇다. 그는 예술가와 권력의 두 얼굴을 가진 거장이었다. 필자는 두 그림을 보면서 그는 권력을 시각적으로 정당화하면서도 민중에게는 보는 것을 통해 믿게 하고 믿는 것을 행동하게 만드는 공공이미지의 대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랑 오달리스크’는 낭만주의풍의 신고전주의 누드화

그랑 오달리스크(그림 3)
그랑 오달리스크(그림 3)

다음은 다비드의 제자이며 후계자인 앵그르의 명작으로 루브르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그랑 오달리스크(그림 3)’다. 앵그르(1780~1867)는 17살 때 다비드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우고 로마 대상 수상으로 로마 유학을 마친 후 나폴레옹 제정기는 로마의 프랑스 아카데미 원장, 왕정복고기는 루이 18세, 나폴레옹 3세 제정기는 궁정화가로 활약했다. 한마디로 출세 가도를 달린 화가였다. 그는 초상화, 역사화, 누드화의 대가로 프랑스대혁명 후 70년간 신고전주의 미술을 고수하며 ‘왕좌에 앉은 나폴레옹 1세’, ‘목욕하는 여인’. ‘샘’ 등의 명작을 남겼다.

그의 작품 가운데 ‘그랑 오달리스크(1814)’는 특별하다. 그림에서 오달리스크가 등을 보인 채 무심한 시선을 던지는 모습은 감정적 거리감을, 매끄럽고 차가운 피부는 고전미를, 우아하고 선율적인 신체는 우아미를 보여주는 신고전주의적 특성이다. 그러나 그녀 주변을 둘러싼 베게, 터번, 커튼, 보석, 부채 등의 섬세한 장식과 부드러운 색감은 환상과 몽상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낭만주의적 특성이다. 앵그르는 나폴레옹의 여동생이며 나폴리왕국의 여왕인 카롤리네 뮈라의 의뢰로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하는데 무려 4년 동안 수정에 수정을 거쳐 완성했다고 한다. 여러 가지 요소를 조화롭게 반영한 사유의 깊이를 가늠하면 그럴 만도 하다.

여기서 프랑스 궁정에서 웬 오스만 터키제국 하렘(별궁)의 궁녀(후궁으로 오해)를 그린 누드화인가? 라는 의문이 들게 된다. 이는 18~19세기 제국주의 시대 형성된 유럽인들의 동양 문화에 대한 허구적이며, 편향적 시각인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무튼 오달리스크의 과도하게 긴 척추와 큰 엉덩이는 고전적 비례미를 벗어난 환상적 형태미고 영웅적 서사나 민중 계몽적 시선이 아닌 개인적 욕망을 형상화한 것은 신고전주의적 특성은 아니다. 그러나 명작은 시대를 초월한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이성적 신고전주의 미술에서 감성적 낭만주의 미술로 넘어가는 과도기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신고전주의 미술은 계몽주의 시대 이성의 미를 상징

이렇게 신고전주의 미술은 1789년 프랑스대혁명 전후로 루이 16세 말기부터 나폴레옹 제정 시기까지 정치적 격변기에 나타난 미술사조였다. 자유, 평등, 박애 정신을 ‘인권선언’에 담은 프랑스대혁명의 이상은 현실과 달랐다. 그렇기에 신고전주의 미술은 국가권력(왕정, 공화정, 제정) 수호를 위한 정치적 도구이면서 계몽주의 시대 민중계몽의 도구로 활용되었다. 여기서 신고전주의 미술은 몇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남긴다.

첫째, 미술은 시대의 거울이라는 점이다. 즉, 프랑스 혼돈기와 근대사회로 넘어가는 격동기에 나타난 미술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미술은 정치적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신고전주의 미술은 국가가 제도적으로 양성한 엘리트 미술가(다비드, 앵그르 등)들이 주도했기 때문이다. 셋째, 미술은 시대정신이 사조의 변화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즉, 로코코(쾌락의 미)-신고전주의(이성의 미)-낭만주의(감정의 미) 미술로의 변화는 이를 말해준다. 사조는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중첩되고 맞물리면서 서서히 전환된다. 예술은 흐름이기 때문이다. 이제 신고전주의 미술은 1815년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쇠퇴하면서 시민계급의 성장과 산업혁명 등의 영향으로 개인의 자유, 감정, 자연 등이 강조되는 낭만주의 미술을 예고하고 있었다.

정광균 칼럼니스트

정광균 칼럼니스트(전 주이집트 대사 관광학박사 문화예술칼럼니스트)
정광균 칼럼니스트(전 주이집트 대사 관광학박사 문화예술칼럼니스트)

정광균 칼럼니스트는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제19회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주토론토 총영사와 주이집트 대사를 역임하며 외교 현장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외교관 은퇴 후에는 학문의 길로 전환하여, 한양대학교 관광학과에서 DMZ 관광개발과 관광자원 분야를 연구하며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남서울대학교 관광경영학과 객원교수와 한양대학교 관광학과 및 국제관광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며 교육자로서도 활동했다. 현재는 추계예술대학교 대학원 문화예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서양미술사 분야의 학위를 준비 중이다. 동시에 한국미술협회 산하 일원회와 현대사생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화가로서도 활발히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필자는 외교관으로서의 국제적 시각, 관광학 전문가로서의 학술적 접근, 현장 예술가로서의 실제적 안목, 서양 미술사 연구자로서의 전문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러한 다면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단순한 여행기나 미술사 해설을 넘어서는 심도 있는 연재를 선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