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홍식의 유럽 톺아보기

종전 80주년, 호전적 민족주의와 초국적 보편주의

2025-05-15 13:00:01 게재

5월 8일은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날로 미국 영국 소련 등 연합국이 나치 독일에 승리를 거둔 기념일이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항복한 8월 15일과 유사한 역할을 한다. 미국과 영국은 자유주의의 나라였고, 소련은 당시 유일한 공산주의 국가였으나 세 나라가 힘을 합쳐 나치 독일과 싸워 굴복시켰다. 호전적 민족주의의 나치 광기를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종류의 초국적 보편주의가 누른 셈이다.

이어 5월 9일은 유럽통합의 출발점이라고 여겨지는 슈만선언을 기념하는 날이다. 로베르 슈만은 1950년 당시 프랑스 외무장관으로 독일에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고 전략 산업인 석탄과 철강을 공동으로 관리하자는 획기적 제안을 했다. 역사적으로 빈번하게 대립했던 프랑스와 독일이 편협한 민족주의를 벗어나 유럽이라는 초국적 평화의 공간을 만들자는 계획이었다. 양국의 화해와 협력은 유럽연합(EU)으로 발전했고 매년 5월 9일은 ‘유럽데이’라 불리는 기념일이 되었다.

트럼프와 푸틴, 이데올로기 동질성에 뿌리

모든 사회에서 역사는 과거를 바라보는 현재의 인식을 반영하며 결국 미래를 만드는 거름이 된다. 2025년 5월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올해는 종전 80주년이며 동시에 슈만선언 75주년인데 앞서 보았듯 이 둘은 모두 초국적 보편주의의 승리를 기념하는 사건이다. 하지만 2025년은 민족주의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사라지지 않았음은 물론 오히려 새로운 지배력을 발휘함을 증명하는 듯하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민족 영역의 확장을 시도하는 전형적인 제국주의 침략이다. 구유고슬라비아에서 내전은 있었지만 한 국가가 군사력을 동원, 다른 국가를 침략해 전면전을 벌이는 행태는 유럽에서 사라졌었다. 과거 소련이 헝가리나 체코슬로바키아에 군대를 파견해 위성국을 통제하는 모습은 있었으나 국가 간 전쟁의 형식은 아니었다.

2025년 5월 8일 블라디미르 푸틴의 러시아는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전쟁을 불사하는 러시아 민족주의의 축제를 벌였다. 중국에서 민족의 부활을 꿈꾸는 시진핑이 행진하는 군대를 이끌고 참여함으로써 상처받은 민족주의 세력의 역사적 연대를 연출했다. 푸틴과 시진핑은 서방의 자유주의 인권 평화주의가 민족의 정신을 부패하고 취약하게 만드는 암세포와 같다는 시각을 공유한다.

올해가 특별한 이유는 도널드 트럼프가 재집권에 성공한 미국이 러시아나 중국과 유사한 공격적 민족주의 세력으로 돌변하면서 국제사회의 충격적인 변화를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은 각각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초국적 이데올로기를 대표하는 초강대국이었다. 소련이 붕괴하고 탈냉전기가 되면서 미국은 유럽과 함께 자유주의로 뭉친 서방의 중심이 되었다.

하지만 미국은 이제 유럽과 연대해 자유주의나 민주주의로 세계를 주도하려는 세력이 아니다.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나 힘에 기초한 거래적 국제관계 등 트럼프의 미국은 19세기와 20세기 초반 무력을 바탕으로 군림하는 제국주의 시대로 퇴보하는 모습이다. 달리 말해 미국과 러시아, 트럼프와 푸틴의 상호 이해는 국익의 조화보다는 이데올로기적 동질성에 뿌리를 둔다는 의미다.

다른 행보 보이는 미국·러시아와 유럽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80년이 지났는데 힘을 합쳐 나치 독일을 무찌른 미국과 소련에서는 호전적 민족주의가 부활한 모습이다. 반면 독일에서는 프리드리히 메르츠 수상이 지난 6일 의회에서 선출되면서 초국적 유럽을 강화하려는 목소리가 정책적으로 힘을 얻는 형국이다. 메르츠 수상의 기독교민주당(CDU)은 민족을 넘는 국제·보편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다. 로베르 슈만이나 1950년대 독일을 이끌던 콘라드 아데나워 수상 등 기독교 민주주의자들이 전후 유럽통합에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메르츠는 수상에 선출되자마자 이튿날 곧바로 프랑스와 폴란드를 방문했다. 유럽의 중요성을 확인하는 정치적 행보다. 게다가 집권 첫해 2/3의 시간을 강한 유럽을 만드는 국제정치에 할애하겠다고 선포해 굳은 의지를 드러냈다. 이제 바르샤바-베를린-파리로 연결되는 유럽의 척추가 형성되고 독일의 기민·사민주의, 그리고 프랑스(에마뉘엘 마크롱)·폴란드(도날드 투스크)의 자유주의가 결합하는 형국이다.

메르츠는 10일 프랑스의 마크롱, 폴란드의 투스크, 영국의 키어 스타머 수상과 함께 키이우를 방문해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지를 확인하면서 침략자 러시아에 휴전을 제안함으로써 초국적 평화연대의 정치를 상징적으로 연출했다. 여기서 눈여겨볼 부분은 이탈리아의 부재다.

유럽통합 초기 멤버인 이탈리아는 원래 유럽의 터줏대감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이제 폴란드가 프랑스 독일과 함께 EU의 ‘빅 쓰리(Big 3)’로 부상한 모습이다. 이탈리아는 조지아 멜로니의 극우 정권으로 트럼프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으나 막상 유럽 주요 파트너의 신뢰는 잃은 셈이다.

공격적 민족주의는 대부분 권위주의적 성향을 띠며 국내의 정적을 제거하거나 압박한다. 반면 보편주의는 대개 자유·민주주의와 결합해 내부적으로 다원성을 중시하는데 그만큼 취약함을 드러낸다. 유럽 안에서 기승을 부리는 극우세력이 대표적이다.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이나 이탈리아의 멜로니는 집권 중이고 독일을 위한 대안(AfD), 프랑스의 민족연합(RN), 영국의 개혁 UK는 위협적으로 성장하는 중이다.

푸틴-시진핑-트럼프로 연결되는 공격적 민족주의 연대에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부터 스타머-마크롱-메르츠-투스크로 이어지는 초국적 보편주의 체인은 명백한 대립구도를 이룬다. EU 집행위원장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서방의 개념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을 정도다. 미국과 유럽의 이데올로기적 결별을 확인하는 발언이다.

트럼프는 독일 정보국이 극우세력 AfD를 우파 극단주의로 규정하자 독일을 두고 ‘위장 전제주의’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극우가 자유민주주의에 가하는 위협을 무시하면서 극우를 옹호하는 발언이다.

초국적 보편주의에 희망의 실마리 있어

종전 80주년 기념을 위해 모스크바와 유럽에서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가 상징적으로 연출되는 동안 바티칸에서는 흰 연기가 새로운 교황의 탄생을 알렸다. 공교롭게도 새 교황 레오 14세는 종전 기념일인 5월 8일 콘클라베에서 선출되었다.

민족주의와 보편주의의 대립에서 가톨릭교회나 교황, 그리고 기독교는 보편주의 진영이다. 기독교는 유대민족의 종교에서 보편 인류를 지향하면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가톨릭이라는 단어 자체가 보편성을 의미한다. 게다가 이번 교황은 미국 출신으로 유럽이 독점하던 교황 자리의 국제화를 이루었다. 직전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르헨티나 출신이었다면 새 교황은 미국에서 태어나 자랐고, 페루에서 봉사하며 국적까지 얻은 국제적 인물이다.

우크라전쟁과 관련해서도 이번 교황은 프란치스코와 결이 다른 발언으로 관심을 끌었다. 프란치스코는 당장 휴전해야 한다며 우크라이나에 ‘백기(白旗)의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레오 14세는 러시아의 부당한 침략이 제국주의적 공격이라며 이는 인류에 대한 범죄라고 했다. 이런 작은 차이를 넘어 두 교황은 모두 트럼프의 이민정책이나 호전적 외교를 견제하는 태도를 대표한다.

미국 중국 러시아가 보여주는 호전적 민족주의 연대와 비교해 유럽이나 바티칸의 초국적 보편주의는 초라하고 취약해 보인다. 하지만 민족주의가 벌이는 제로섬 게임에 견주면 초국적 보편주의는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으며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힘을 갖추고 있다. 거대한 혼란 속에서 작은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실마리다.

조홍식

숭실대 교수

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