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종 칼럼
제주섬의 시간 속에 숨겨진 말과 기억들
서울에 사는 아들이 여자 친구를 데리고 제주 고향집에 갔다. 장차 며느리가 될지도 모를 귀한 손님을 맞이한 해녀 어머니는 여친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 “너 폭싹 속았져(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여친은 어리둥절했다. 표정과 태도는 환영하는 듯한데, ‘나를 보고 속았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제주어 연구자인 강영봉 제주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속다’는 제주어에서 ‘고생하다’는 긍정의 뜻과 ‘속임을 당하다’는 부정의 뜻을 갖는 동음이의어다. 제주 사람에겐 정겨운 인사지만 외지인에겐 혼란을 주는 말이다.
요즘 화제가 된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도 제목 때문에 많은 이들이 오해하고 혼란을 느꼈을 것이다. 제주를 고향으로 둔 필자는 처음엔 제목을 보고 코미디쯤으로 생각하고 넘겼다. 그런데 서울 친구들이 점심을 함께하는 자리에서 그 드라마 이야기를 꺼냈다. 필자가 “제목 뜻은 아냐?”고 물었더니 한 친구가 “남의 말에 속아 고생했다는 뜻 아냐?”라고 답했다. 제목도 모르고 재미있었다니 그만큼 힘 있는 드라마구나 싶었다. 결국 넷플렉스에 가입하고 사나흘에 걸쳐 드라마를 시청했다. 재미있고 놀라웠다. 작가가 제주말의 뉘앙스와 정서를 얼마나 깊이 있게 이해하고 극 속에 잘 녹였는지 감탄스러웠다.
“폭싹 속았수다”와 함께 이 드라마의 키워드라고 할 만한 표현이 “살면 살아진다”였다. 능동과 수동이 혼합된 이 말은 제주여성들 사이에서 고단한 삶을 견디는 지혜였다. 칠성판을 지다시피하는 해녀의 고달픈 물질, 4.3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이들, 고기잡이 나갔다 풍랑으로 돌아오지 못한 남편을 둔 젊은 어머니들이 절망의 순간에 나이든 이웃 아낙이 건네는 위로섞인 체념의 말. “살당보민 살아진다.”
이 말은 현실에 눌려 주저앉지 말고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살아내라는 격려였다. 그것은 제주 여성들만의 언어로 전하는 연대의 방식이었다.
70여년 걸친 고난의 한국 현대사 축소판
이 드라마는 제주 여성 3대의 러브스토리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단순한 가족사가 아니다.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 70여년에 걸친 시대변화를 그들의 삶을 통해 비추며 개인과 가족의 서사를 곧 한국 현대사의 축소판처럼 보여준다. 여성만의 성역인 불턱에서 오가는 드세지만 정겨운 말들, 거센 파도와 검은 현무암 위에 새겨진 삶의 발자국들은 지역성과 함께 보편성을 동시에 품는다. 그래서 이 드라마가 국내에서는 물론이고 K-컬처 물결을 타고 해외에서도 관심을 끌고 있는게 아닐까. 제주말은 단지 언어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고 공동체의 메모리칩과 같다.
드라마를 보고 나서 자연스레 노벨문학상 작가 한 강의 최근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가 떠올랐다. 제주 4.3사건 당시 남편이 학살당하고 남동생을 잃은 한 여인의 기억을 딸 인선이 더듬어가는 이야기다. 이 작품은 문학적으로도 의미가 크다.
많은 4.3소설들이 다큐멘터리처럼 서술했다면 한 강은 주인공의 내면과 ‘의식의 흐름’을 따라간다. 그 방식은 아일랜드 출신 위대한 작가 제임스 조이스의 ‘죽은 사람들’을 연상케 한다. 특히 중산간 마을에 내리는 눈의 묘사는 비극적 상징성을 띤다. 4.3 때 가장 사람이 많이 죽어나갔던 곳이 바로 중산간 마을이었고 그 눈은 죽음을 덮으면서 동시에 기억을 되살리는 장치다.
'폭싹 속았수다'와 '작별하지 않는다', 장르도 다르고 톤도 다르지만 이 둘은 제주섬이라는 공간을 매개로 ‘사랑과 죽음, 그리고 기억’을 꺼내 보여준다. 하나는 바다, 하나는 눈. 하나는 생의 언어, 하나는 침묵의 기억. 그러나 이 두 작품이 만나는 지점은 바로 ‘제주의 말’이다.
제주 어머니들이 오랜 세월 폭싹 속아가며 품고 이어온 말과 기억, 그것이 지금 세상 밖으로 조명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말의 서사가 젊은 문화 예술작가들에 의해 제주밖으로 외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제주의 말은 소멸 위기에 처해 있다. 강영봉 교수는 “2010년 유네스코가 제주어를 사라지기 직전 단계인 ‘소멸위기 4단계’ 언어로 분류했다"고 말한다. 그는 유네스코가 권하는 말을 보존하는 네 가지 방안 즉 첫째 제도 보완, 둘째 외국 사례 조사, 셋째 학교 교육 강화, 넷째 실제 사용 확대 등을 통해 제주어를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제주 말이 살아야 제주 기억도 함께 산다
말이 사라진다는 것은 단지 소통수단의 소멸이 아니라 곧 문화와 기억의 단절을 뜻한다. 제주 어머니들이 오랜 세월 폭싹 속은 대가를 이제 보상받아내려는 때를 앞두고 일어나는 제주어의 소멸을 보는 것은 슬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제주인들이 해야 할 일은 듣고 말하고 기록하고 이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제주의 말이 살아야 제주의 기억도 함께 산다. 그것이 제주가 일회성 관광지에서 독특한 문화를 가진 공동체로서 발전하고 또한 한국문화의 다양성이 유지발전되는 길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