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미 국채 연동한 기축코인시대 오나
미국은 전 세계에서 자국통화로 이론상 무제한의 국채를 발행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다. 달러가 국제무역의 88%, 글로벌 외환보유고의 59%를 차지하는 기축통화이기 때문이다. 미국 국채는 글로벌 중앙은행과 기관투자자들에게 여전히 ‘안전자산’으로 간주되고 달러는 결제통화와 준비통화로 막강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국채금리 급등과 미국 신용등급 강등, 연방정부의 재정적자 확대 흐름은 이같은 ‘신화’에 균열을 내고 있다.
이 같은 사태에 가장 어깨가 무거운 사람은 아마도 베선트 미 재무부 장관일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함께 임기를 시작한 주요 경제 책사를 꼽으라면 관세정책을 주도한 피터 나바로 백악관 무역·제조업 담당 고문,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 정부효율부(DOGE) 수장을 맡은 일론 머스크,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스티븐 미란 위원장, 그리고 재무부 장관을 맡은 스콧 베선트를 꼽을 수 있다. 그런데 트럼프의 관세전쟁이 날짜를 더해갈수록 베선트 장관의 존재감이 커지면서 사실상 경제정책의 주도권을 넓혀 가고 있다.
부채의 덫에 빠진 미국, 흔들리는 달러패권
트럼프정부 출범 초기 경제정책은 미란 CEA 위원장이 작성한 보고서를 기반으로 질주하는 듯 했지만 중국과의 관세협상 이후 트럼프의 정책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시장의 신뢰가 훼손되면서 사실상 방향을 전환한 것으로 보인다. 미란보고서는 인위적인 달러가치의 절하로 미국의 수출증가와 수입감소를 통해 경상수지 개선을 도모하고, 늘어난 재원으로 미국의 제조업 경쟁력을 강화하며, 기축통화국의 지위를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강달러에 따른 비용을 지적하며 1985년 플라자 합의와 비슷한 ‘마러라고 합의’를 제안했다. 또 미국이 군사적 우산을 제공하는 것을 협상의 지렛대로 삼아 우방국들에 영구채에 가까운 100년물 국채를 제로금리 수준으로 발행해 우방국들이 이를 매수해가면 미국은 글로벌 시장에서 달러투매를 방지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시장의 신뢰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당분간 실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미란 위원장은 22일(현지시간) 블룸버그 팟캐스트에 출연해 “비밀리에 무언가를 추진하고 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며 달러가치 절하를 위한 통화협정이 논의되고 있다는 주장에 선을 그었다. 그는 “통화 정책에 대한 공식 권한은 베선트 재무장관에게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정부, 미 국채와 달러패권 유지 수단으로 스테이블 코인 선택
월가 출신인 베선트 장관은 신뢰에 균열이 가고 있는 미국채를 안정시키기 위해 몇 가지 정책을 공개적으로 내놓고 있다. 미국 은행들에 대한 자본규제 중 하나인 보완적 레버리지 비율(SMR) 완화를 통해 미국채 매입을 더 늘릴 수 있도록 하는 정책이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미 재무부 국채 바이백(buyback, 조기상환) 액수를 늘리고, 미 연방준비제도의 소마계정을 통한 (System Open Market Account) 증권관리, 연준의 양적긴축(QT) 중단 등이 대안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잘 알려진 대책 외에 베선트 장관이 추진하려고 하는 스테이블코인 정책은 꽤 흥미롭다. 스테이블코인은 미 달러나 국채 등 실물자산에 가치를 1대1로 연동한 암호화폐를 뜻한다.
트럼프정부는 지니어스 법안(GENIUS Act)을 통해 빠르고 저렴하게 국경간 달러를 이동시키며, 미 달러화의 지배력을 유지하고, 미 국채 수요를 넓히는 가상자산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이 법안은 최근 미 상원 토론종결 표결에서 공화당의원뿐 아니라 민주당 의원 15명이 찬성표를 던지면서 가결됐고 정식 법안 표결 절차가 남아있다.
이에 앞서 4월 30일(현지시간) 미 재무부 국채 차입 자문위원회는 사상 최초로 스테이블코인의 미국 국채시장에 대한 잠재적 영향을 공식적으로 논의했다. 베선트 장관에게 제출된 재무부 차입자문 위원회 회의록에 따르면 “국채에 대한 순 신규 수요를 어느 정도까지 초래할지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있었다”고 보고했다. 또한 스테이블코인의 시가총액은 2340억달러이며 이 중 약 절반이 미 단기국채(T-bills)에 투자된 것으로 조사됐다. 테더(USDT)와 서클(USDC)이 준비자산으로 보유한 미국 국채만 1260억달러에 이른다. 비록 단기채 중심이지만 독일 중앙은행이 보유한 국채보다 더 많다. “달러는 우리 돈이지만 당신들의 문제다”. 닉슨 미국 대통령 시절 존 코넬리 재무장관이 한 말이다. 주어인 ‘달러’를 ‘스테이블코인’으로 바꾸면 이 코인들은 결국 ‘기축코인’이 돼서 우리 원화에도 영향을 미칠 날이 머지 않았다.
안찬수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