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탁 칼럼

투표장 가는 발걸음이 가벼운 까닭

2025-06-02 13:00:55 게재

국내 유력한 보수신문이 이번 대선에서 진보 후보가 당선되는 것을 전제로 기획기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뉴스가 눈에 띈다. 이 신문 편집국 실무책임자가 사내 공지를 통해 “이번 선거는 과거 대선과 달리 판세 예측이 가능한 예외적 선거”이므로 “경우의 수를 모두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고 기자들에게 지시했다는 것이다.

언론은 뉴스가치가 높은 이벤트가 마감 임박한 시간에 결론 나올 것으로 예상될 때 발생가능한 경우의 수를 모두 고려해 준비하는 게 보통이다. 어느 한쪽의 결론을 예단해 다른 가능성을 아예 배제했다가 혹시라도 다른 결과가 나오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 월드컵 축구 같은 관심 많은 운동 경기나 대통령 선거 같은 중요 정치 이벤트가 있을 때 언론은 두 가지 방향의 기사를 모두 준비한다. 마감시간에 늦지 않으려면, 그래서 경쟁 언론사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무모하게 한 쪽에 베팅하기보다 이쪽이 이길 경우와 저쪽이 이길 경우 다 기사로 써놓는 게 안전하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같은 보험성 기사가 필요없다는 게 그 신문의 판단이라고 하니 이번 선거의 특징과 의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가 아닌가 싶다.

사실 이번 선거는 원래 우리나라 정치 일정에는 없던 조기대선이라는 사실에 역사적 의미가 있다. 선거의 원인이 위헌·불법적인 비상계엄과 그로 인한 현직 대통령 파면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결과를 예측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당내 후보가 되면서 자동으로 2위 주자가 된 후보가 계엄과 탄핵에 대해 시종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다 내란수괴 혐의자에게 “남들 눈도 있으니 제발 우리 당에서 나가달라”고 애걸하는 마당이다. 이런 후보가 국민들에게 표를 달라고 하는 것은 나무에 올라 물고기 구하는 격과 별 다름없지 않겠나.

헌재의 선고로 사실상 대선 결론 내려져

선거 막판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세력들이 결집하면서 판세가 예측불허의 상황으로 바뀌었다고 보는 견해도 일부 있는 모양이나 선거 원인을 망각한 데서 나오는 착시일 뿐이다. 온 세상이 사건의 발단을 알고 있는데 결과가 다르게 나올 수는 없다. 헌법재판소가 재판관 만장일치 의견으로 ‘윤석열 대통령 파면’ 결정을 내렸을 때 이번 대선의 결론은 정해진 셈이다.

선거의 시대적 의미가 이처럼 뚜렷하다 보니 이번 대선에선 불꽃 튀는 정책이슈도 없고, 엎치락 뒤치락 하는 요동이나 긴장감도 없었던 것 같다. 대체로 밋밋하면서 때때로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우스꽝스런 모양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대개 선거에서 민감한 정책 이슈를 들고 나와 파이팅을 외치는 쪽은 정권교체를 원하는 야당이다. 하지만 대통령이 탄핵되어 여당이란 존재 자체가 없어졌고, 야당 후보는 부동의 1위 주자가 돼 있으니 누가 여당이고 누가 야당인지 모르는 애매한 상황이다. 이 때문에 1위 후보는 부자 몸 조심 하듯 판세에 영향을 미칠 돌발변수는 되도록 만들지 않으려 들고, 추격하는 2위 후보는 아직 권력을 잡지도 않은 후보를 가리켜 엉뚱하게 ‘독재정권’이라고 공격한다.

이렇게 공수가 어색하게 뒤바뀐 상황에서는 여야 정책대결이 들어설 공간이 없다. 외교 안보 국방에서부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 영역에 이르기까지 국정향배는 정권 성향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지만 후보별로 어떤 주요 공약이 있는지 우리는 거의 알지 못한다.

1위 후보는 ‘코스피 5000 시대’ ‘AI 3대 강국’ 같은, 무얼 어떻게 하겠다는 것보다는 잘 되길 바란다는 식의 비전과 전망을 제시한다. 반면 2위 후보는 당내 경선 때부터 투표 마지막 날까지 줄곧 ‘단일화’만 외쳐댄다. 선거에서 단일화는 지지기반이 비슷한 복수의 후보가 하나로 합치는 전략인데 2위 후보의 단일화는 한번은 후보직을 빼앗겼다가 되찾은 것이고, 다른 한번은 굳이 싫다는 사람에게 자기 밑으로 들어오라고 종용하다 실패한 것이니 남는 게 없다.

여기에 경선탈락 후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해외에 나가 있는 구 정치인에게 굳이 특사단을 보내 단일화 구애를 펼쳤다가 퇴짜 맞은 아픔도 있다. 그런데도 무슨 비단주머니나 되는 양 단일화에 집착해왔으니 1위 후보로선 표정관리에 바빴을 것이다.

대세에 변함없어 보이는 예외적인 선거

심심하던 선거를 조금은 맵고 짜게 만들어준 것은 설화(舌禍) 또는 말꼬리 잡기 토론전이다. 1위 후보의 ‘커피원가 120원’과 ‘호텔경제학’ 발언에 2~3위 후보가 일제히 공세를 퍼부으며 선거 열기가 달아오른 것이다. 여기에 3위 후보의 ‘젓가락 발언’과 장외에서 나온 ‘2위 후보 배우자 비하발언’까지, 1위 후보에 불리한 이슈들이 잇달아 터지면서 뜨거워졌다.

만약 시간이 두어 달 더 남았다면 선거 원인은 잊혀지고 돌발 이슈의 위력은 강해져 판세가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선거는 내일이고, 대세에 변함은 없어 보인다. 투표장 가는 발걸음이 어느 때보다 가볍게 느껴지는 대선이다.

신한대 특임교수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