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김재균 국립농업박물관 학예본부장

보존해야 할 농민의 경험지식

2025-06-09 13:00:10 게재

요즘이야 첨단과학 장비로 관측한 기상 관련 자료들을 농사에 활용하지만 예전에는 주로 자연환경에 의존하였다. 즉 비 오면 씨뿌리고 가물면 하늘만 쳐다보는 식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조상들이 무작정 손 놓고 자연에만 의존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연의 변화를 자세히 관찰하여 이를 기록하고 기억해 농사의 적기로 삼았다. 즉 바람 세기, 구름 모양, 새소리, 꽃피는 시기 등도 가벼이 보지 않고 세심히 살펴 농사에 접목한 것이다. 자연의 변화가 곧 시계요 달력이었던 셈이다.

계절의 변화를 실감 나게 기록한 것이 24절기다.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매월 2개씩 1년에 24개의 절기를 두고 이를 농사의 기준으로 삼았다. 이를테면 소만엔 모심고 망종엔 보리베고 입하에는 들깨를 심는 식이었다.

그래서 ‘보리는 망종 사흘 전까지 베라’, ‘처서에는 가을채소 심어라’, ‘곡우에는 씻나락 담가라’ 등 절기별 농사 명령을 하는 말들이 생겨났다. 이렇듯 절기는 농사의 골든 타임을 알려주는 알람 역할을 하기도 했다.

24절기는 과학적 근거에 기초한 계절 분류방식으로 비록 중국 내륙인 화북지방의 기후를 기준으로 삼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요긴하게 활용되었다.

절기별 농사일을 기록한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오는데 정조 22년 11월 30일 기사에 농사를 권장하고 농서를 구하는 윤음에 대한 장윤의 상소문에 ‘우수에는 삼밭을 갈고, 경칩에는 농기구를 정비하며, 춘분에는 올벼를 심고, 청명에는 올기장을 심으며, 곡우에는 호미질하러 나가고, 입하에는 들깨를 심으며, 망종에는 모시와 삼을 거두고, 하지에는 가을보리를 거두며, 입추에는 메밀을 심고, 처서에는 올벼를 수확한다’는 대목이 있다. 마치 연간 농사일정표를 보는 듯하다.

조선 후기 농촌의 모습과 풍속, 다달이 농가에서 해야 할 일 등을 기록한 ‘농가월령가’에는 계절별 농가의 모습들이 나오는데 양력 6월에 해당하는 5월령에는 보리 수확과 타작, 양잠에 관한 내용이 있는데 이는 6월에는 보리농사가 한창이었다고 알려주는 자료다. 6월령의 봄보리, 밀, 귀리, 팥, 조, 기장 등의 수확에 관한 기록 등을 통해 월별 농사를 알 수 있다. 이처럼 농가월령가는 농민들에게는 훌륭한 농사지침서였다.

계절의 변화, 즉 철을 모르는 사람을 철부지라 하는데, 이들은 절기를 모르니 주변에서 일어나는 자연의 변화를 기억해 농사 시간표로 만들었다. 예를 들자면 ‘아카시아 꽃이 피면 참깨를 심어라’, ‘조팝나무 꽃필 때 콩을 심어라’ 등이다. 이런 것들은 농민들의 오랜 경험에서 나온 전통 지식이라 할 수 있다. 국가나 학자들이 체계적으로 정리한 농사지식도 중요하지만 농민들이 영농과 생활을 통해 얻은 경험지식도 가치 있는 것이다.

첨단 기술로 장착한 로봇과 드론이 농사짓는 요즘 세상에 전통 지식의 가치가 외면받을 수 있다.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경험의 결정체인 농민의 경험지식은 미래농업에 활용될 수 있는 무형유산이다. 농민의 기억, 경험, 추억 등을 기록해 보존하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갖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