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주의 미술은 민중의 현실을 직시한 시각언어였다
정광균의 80일간 유럽미술관 산책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 모던미술과 명작 이야기 (11)
필자는 지난해 여름 ‘나홀로 자유여행’으로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80일간의 유럽미술 여행’을 다녀왔다. 유럽 12개국의 주요 미술관과 거장들의 개별미술관 순례 경험을 독자분들과 공유하면서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 모던 미술과 명작이야기’를 미술사적 인문학적 견지에서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는 15세기 이후 르네상스, 매너리즘 미술에 이어 17~18세기 바로크, 로코코 미술을 살펴보았다. 중세의 붕괴로 신 중심의 미술은 인간중심의 르네상스 미술로 전환되었으며 종교개혁과 대서양 시대는 유럽의 세력 판도와 미술의 지형을 바꿔놓았다. 구교국가이면서 르네상스를 꽃피운 이탈리아, 대항해시대 해상강국인 스페인, 절대왕정 국가인 프랑스, 신교국가이면서 신흥 해상강국인 네덜란드는 각국이 처한 상황에 따라 교황, 국왕, 귀족, 시민 계급 중심의 미술을 구현했다. 미술은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18~19세기 2개의 대혁명인 프랑스대혁명, 산업혁명은 유럽의 총체적인 변화를 불러왔고 이 시기에 나타난 3개의 미술사조인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는 이성, 감성, 현실이라는 본질을 강조하면서 근대미술의 지평을 확대하였다. 이제 19세기 중반에서 후반에 걸쳐 나타난 민중 중심의 사실주의 미술을 살펴본다.
사실주의(Realism) 미술은 19세기 중엽 프랑스를 중심으로 등장한 미술사조다. 이상적인 낭만주의 미술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났지만 미술사와 미술계 전반을 뒤흔든 사조였다. 왜 그런가? 프랑스대혁명과 산업혁명은 근대사회를 알리는 서곡이었을 뿐 당시의 유럽 사회는 혼돈 그 자체였다. 우주, 생명, 예술도 그렇듯이 혼돈은 창조로 귀결된다.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예술사조도 그렇다. “브라질에서 나비가 날갯짓하면 텍사스에 폭풍이 온다”라는 ‘나비효과’도 초기에는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이는 복잡한 생태계처럼 수많은 요소가 상호작용하면서 혼돈의 가장자리에서 나타나는 창발 (Emergence‧떠오름 현상)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혁명의 시대(1962)’에서 ‘이중 혁명(Duel Revolution)’인 프랑스대혁명과 산업혁명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근대국가와 근대 자본주의 체제의 탄생을 가져왔다고 분석했다. 혼돈이 낳은 결과다. 사실주의 미술도 그러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사실 미술사 속의 사실주의는 인상주의에 가려 그 빛을 발하지 못한 사조였다. 인상주의가 새벽이라면 사실주의는 그 직전의 어두움과 같았다. 그와 같이 19세기 중반의 유럽 사회 분위기는 어두웠고 민중의 현실은 냉혹했다. 시대정신은 한가한 낭만주의 미술과 거리가 멀었다. 산업혁명의 급속한 진전은 기계화와 대량생산, 농촌의 해체와 도시화, 계급의 분화와 노동자 농민의 빈곤, 실업, 노동착취 등 각종 사회문제를 일으켰다. 급기야 1848년 프랑스에서 대혁명의 이상과 산업혁명의 현실은 2개의 마주 보는 열차가 충돌하듯 2월혁명이 폭발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낭만주의 미술은 사실주의 미술에 자리를 내어주게 되었다. 미술이 ‘시대의 거울’임을 또다시 증명한 것이다. 이제 민중의 현실은 예술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사실주의 미술은 노동자, 농민, 빈민, 광부 등 소외된 인간의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사실주의 미술은 민중 중심의 현실참여 미학
사실주의 미술이 프랑스에서 나타나게 된 구체적인 배경과 특징은 무엇인가? 1848년 2월혁명은 1789년 대혁명, 1830년 7월 혁명에 이은 세번째 혁명이었다. 혁명의 배경은 달랐지만 정치적 억압과 불평등, 민주주의, 경제난에 대한 민중의 저항이라는 혁명의 목적은 같았다. 그 과정에서 시대정신의 변화는 신고전주의(이성)-낭만주의(감성)-사실주의(현실) 미술로의 전환을 가져왔으며 2월혁명은 사실주의 미술의 등장과 낭만주의 미술의 퇴조를 가져왔다. 이렇게 사실주의 미술의 배경에는 ‘두 개의 혁명’이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등에서의 잇따른 민중봉기, 과학의 발달, 마르크스주의, 콩트의 실증주의도 동인이 되었으며 1839년 ‘다게레오타이프(Daguerreotype) 사진술’은 사실주의, 인상주의 미술, 아카데미즘, 미술시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마디로 지각변동 수준의 충격이었다.
사실주의 미술은 단지 사실적으로 그리는 미술이 아니었다. 민중의 현실을 바라보는 사회적, 미학적, 철학적 시선에 따라 그림의 양식은 달랐다. 사실주의 미술과 ‘바르비종파’로 불리는 밀레 등의 자연주의 미술과의 관계는 그러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자연주의 미술은 사실주의 미술에서 파생되어 발전한 것이었다. 즉 사회적, 비판적 시각을 배제하고 중립적, 객관적 시각에서 자연 속 인간의 삶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렇다. 사실주의 미술은 신화, 낭만과 같은 허구적 존재보다는 현실 속의 인간, 사회, 자연의 본질을 추구하였으며 소외된 인간, 풍경, 노동, 빈곤 등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았다. 그렇기에 사실주의 미술은 민중 중심의 ‘현실참여 미학’을 기반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시각언어(Visual Language)’였다.
오르세미술관은 민중의 삶이 미술사의 주류로 편입된 미술관
필자는 지난해 여름 6월 11일에서 17일간 파리의 오르세미술관, 루브르 박물관, 프티 팔레 미술관, 밀레 미술관, 바르비종 미술관 등을 둘러보면서 사실주의 미술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사실주의 미술도 낭만주의 미술처럼 회화가 중심이었다. 이 대목에서 독자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미술과 건축과의 관계사를 잠깐 살펴본다. 르네상스 이전의 이집트, 그리스·로마미술은 건축, 조각, 공예가 중심이었다. 하지만 르네상스 이후-바로크-로코코-신고전주의 미술은 ‘총체적 미술(종합미술)’이었으나 회화, 건축이 중심이었다. 낭만주의 미술 이후는 철, 유리, 콘크리트 등 신소재의 등장과 건축 공법의 발달로 건축은 미술에서 분화되기 시작하였다. 건축예술가도 설계자, 기술자, 건축가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제 건축은 예술이 아니고 설계와 엔지니어링의 산물이 된 것이다. 그 이후 독일의 ‘바우하우스(Bauhaus, 1919~1933)’가 기능주의 건축을 추구하면서 건축은 미술에서 완전히 독립하게 된다. 따라서 낭만주의 미술 이후의 유럽 미술사는 곧 ‘회화 중심’의 미술사로 보면 되겠다.
오르세미술관(근대, 모더니즘 미술)에서는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미술(2, 5층)뿐만 아니라 사실주의 미술(1층)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다. 루브르 박물관(고대~1848년 미술)-퐁피두 미술관(현대미술)의 연장선에 있는 센 강변의 오르세 기차역을 1986년에 개조한 오르세 미술관은 루브르와 퐁피두 미술관 사이의 미술 공백을 메꾸기 위해 1848년 2월혁명~1914년 1차 세계 대전 직전까지의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미테랑 정부(사회당)의 “미술사를 잇는 다리”라는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미술관 개관 시에는 쿠르베의 ‘오르낭의 장례식’ 등의 대형작품을 기념으로 전시하였는데 이는 ‘민중의 삶’을 미술사의 주류로 편입시키는 조치였다. 한마디로 사실주의 미술의 복권이었다. 파리 근교에 있는 바르비종의 ‘밀레 미술관(밀레의 집)’과 ‘바르비종 미술관’은 밀레, 루소, 디아즈 등의 자연주의 작품을 관람할 수 있다. 마을을 둘러보면서는 ‘바르비종파’ 화가들이 공동체를 만들어 ‘퐁텐블로 숲’을 오가면서 그림을 그렸을 모습을 생각하니 ‘살아있는 미술사’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쿠르베의 ‘돌 깨는 사람’은 혁명적 사실주의 미술의 선언
프랑스 사실주의 회화의 대가는 구스타브 쿠르베, 장 푸랑수아 밀레, 오노레 도미에 등이다. 그 가운데 쿠르베(1819~1877)는 사실주의 미술의 창시자였다. 그는 오르낭 지방의 부농 가문 출신으로 법학도가 되기 위해 브장송 대학에 입학했으나 2년 후 법학 공부를 포기하고 파리로 가서 화가의 길을 걸었다. 화가로서 그의 삶은 도전적이었으며 개인적 삶도 파란만장했다. 파리만국박람회에서 그의 작품이 배제되자 국가 주도의 살롱전을 거부하고 독립전시관을 설치하는가 하면 사회주의 자치정부인 파리코뮌의 미술위원회 의장으로 활동한 탓에 스위스로 망명해서는 고립된 삶을 살다 생을 마쳤다. 자신의 신념대로 과거의 관습과 아카데미즘에 저항하면서 사실주의 미술을 선도한 거장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은 항상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1848년 2월혁명 후의 ‘돌 깨는 사람들(1849년)’은 1850년 파리 살롱전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그림 1). 길가에서 고된 육체노동을 하는 젊은 청년과 노인을 대형캔버스 (259x167)에 그린 것이다. 찢어지고 남루한 옷, 거친 손과 구멍 난 양말, 얼굴은 보이지 않은 채 일만 하는 옆모습, 어두운 갈색과 회색 톤의 단조로운 색감은 사실주의적 요소다. 역사화 작품 크기에 영웅이 아닌 육체노동자를 주인공으로 삼고 아름다운 미술이 대세였던 당시에 ‘추한 그림’을 발표했으니 큰 논란을 일으킨 것이다.
쿠르베가 이러한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을까? 아니다. 그는 2월혁명 직후 프랑스 노동자의 권리와 사회적 불평등문제가 수면 위로 떠 오르자 이를 시각언어로 보여준 것이다. 그렇다. 돌 깨는 사람은 미술을 넘어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을 사회적으로 고발한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이 그림은 2차대전 때 연합군의 드레스덴 공습 때 소실되어 원작은 남아있지 않지만 사실주의 미술의 위대한 선언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르낭의 장례식’은 시대정신을 반영한 사실주의 명작의 진수
다음은 오르세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쿠르베의 ‘오르낭의 장례식(1850)’이다 (그림 2). 이 그림은 작품의 크기, 내용, 형식, 미술사적 측면에서 사실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걸작이다. 쿠르베의 고향인 오르낭에서 있었던 친척 할아버지의 장례식 장면을 그린 것으로 등장인물 46명은 실제 주민이다. 그림의 중심은 십자가와 무덤이지만 종교적 영광은 없으며 시골 사람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무거운 분위기 속에 서 있을 뿐 서사가 없다. 구도, 색조, 묘사도 단순하고 투박하며, 거칠어서 서정성이나 숭고함이 없다. ‘의미’가 아닌 ‘존재’를 보여주는 사실주의적 특징이다.
작품 크기가 당시 역사화, 종교화에서만 허용되던 사이즈(668x315) 이고, 내용은 영웅담 같은 위대한 주제가 아닌 일상의 장례식이며 형식을 고전주의 대작처럼 인물들을 수평으로 배열한 것은 ‘민중의 위상’을 제고시키려는 쿠르베의 의도된 메시지였다. 이 그림은 작품의 스케일, 내용의 반전, 형식의 해체, 시대정신의 반영이라는 측면에서 명작의 진수다. 시골의 장례식이지만 십자가, 장례를 집도하는 신부, 무덤은 있어도 종교화에 등장하는 천사는 없다. 쿠르베는 “나는 천사를 본 적이 없으므로, 천사를 그릴 수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는 신화, 종교, 상상 속의 존재 (신, 천사)는 본 적이 없기에 ‘눈에 보이는 현실만을 그리겠다’라는 사실주의 정신의 선언인 동시에 미학적 혁명을 알리는 선전포고였다.
‘이삭 줍는 여인들’은 농촌 여성 노동자의 빈곤한 삶을 그린 명작
자연주의 미술의 대표적인 거장은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다. 프랑스에서 ‘국민 그림’으로 불리는 밀레의 ‘만종’은 과거 한국에서는 ‘달력 그림’이나 ‘이발소 그림’으로 불릴 정도로 친숙한 그림이다. 그의 그림에서는 농촌의 서정적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묻어난다. 이는 밀레가 노르망디 지역의 한 농촌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농부의 삶을 경험하고 관찰한 배경 때문이다. 그는 어린 시절 그림에 재능을 보여 부친의 지원으로 도시로 나가 그림 수업을 받은 후 1837년 파리로 이주해서는 에콜 데 보자르에서 계속 그림을 배우면서 초상화, 풍경화 작가로 활동했다. 그러나 1849년 경제적 어려움, 건강 문제 등도 있었지만 파리화단에 환멸을 느껴 파리 근교의 바르비종으로 이주하여 ‘바르비종파’의 핵심 인물로 활약했다.
그는 ‘만종’ 외에도 ‘씨뿌리는 농부’, ‘이삭 줍는 여인들’ 등 자연주의 명작들을 많이 남겼는데 오르세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삭 줍는 여인들 (1857)’은 그의 대표작이다(그림 3). 농촌 여성 노동자의 삶을 묘사하면서 ‘노동의 숭고함’과 ‘농촌의 신성함’을 상징적으로 잘 표현한 걸작이다. 그림은 넓은 들판에서 세 명의 여인들이 얼굴은 보이지 않고 허리를 굽힌 채 이삭을 줍고 있는 장면이다. 그러나 그림 속에는 사실주의 철학이 담겨 있다. 배경 속의 수확을 끝낸 밀밭, 짐을 싣는 마차, 곡식을 수거하는 일꾼은 풍요로운 수확을 말해주며 흘린 이삭을 줍는 여성들은 노동자이며 농촌 빈민의 고단한 삶을 시사한다. 즉, 풍요 속의 빈곤을 비판적 시선으로 본 것이다. 살롱전 출품 당시 상류층 관객들은 이 그림을 보고 ‘가난한 자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탐낸다’라고 비난했다고 한다. 그러나 밀레는 이 작품을 통해 단순한 농촌 화가가 아닌 사회적 시선을 가진 사실주의 거장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삼등열차’는 산업사회 속 인간의 고단한 삶을 상징한 걸작
오노레 도미에(1808~1879)는 쿠르베와 동시대에 프랑스 사실주의 미술을 이끈 거장이다. 그는 마르세유에서 가난한 유리공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파리로 이주해서 인쇄소에서 일하며 독학으로 그림을 배운 화가였다. 젊은 시절에는 석판화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라 카리카튀르’ 등 잡지사의 초청으로 정치 풍자만화를 그리며 명성을 얻었으나 1832년에는 루이 필리프 국왕을 풍자한 그림으로 투옥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1948년 혁명 이후에는 회화로 전향해서 ‘삼등열차’. ‘돈키호테’, ‘국회의원들’ 등의 명작을 남겼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삼등열차(1862~64년경)’는 그의 대표작이다(그림, 4). 캐나다 오타와의 내셔널갤러리, 샌프란시스코의 파인아트 미술관에도 삼등열차 작품이 있는데 모두 같은 시기에 여러 장을 그린 것이다. 아마도 작품에 메시지를 담기 위해 연습을 많이 한 것으로 짐작된다. 작품들이 미국에 있는 것은 유럽에서 화상들 손에 의해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라 한다. 오르세미술관에서는 도미에의 스케치 작품만 보게 되어 아쉬웠지만 필자는 미국과 캐나다에 있을 때 이 작품을 본 적이 있고 도미에의 대표작이기에 여기서 살펴본다.
작품은 열차의 삼등석에 탄 노동자 가족과 서민들의 피곤한 삶을 그린 것이다. 전면의 나이 든 여성, 아이를 안고 젖을 먹이는 젊은 여성, 잠에 곯아떨어진 소년은 한 가족의 지친 삶을, 뒤편의 서민들이 무표정으로 빼곡히 앉아있는 모습은 삼등열차의 애환을 말해준다. 압축된 수평 구도, 암갈색 톤, 조용한 광선의 대비는 사실주의적 특징이다. 19세기 산업사회 속 인간의 고단한 삶을 상징적으로 압축한 걸작이다. 이 그림은 당시에는 빛을 보지 못하다 20세기 들어 사실주의 명작으로 재평가받았다.
사실주의 미술은 19세기 산업 시대의 거울
이렇게 사실주의 미술은 낭만주의적 이상을 배척하고 ‘민중의 현실’을 직시한 시각언어였다. 산업사회 속 인간의 삶을 비판적 시선으로, 또는 산업사회 밖, 즉 자연 속 인간의 삶을 관조적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즉,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미술은 동전의 양면처럼 현실 속 인간의 삶, 즉 삶의 본질을 서로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것이다. 이처럼 사실주의 미술은 19세기 ‘산업 시대’의 거울이었으며 미술사, 미술계 전반을 뒤흔들며 모더니즘 미술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다. 여기서 몇가지 시사점을 살펴본다.
사실주의 미술은 첫째, 예술의 민주화를 가져왔다. 즉, 평범한 민중이 미술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둘째, 500년간 지속된 고전미술의 균열을 가져왔다. 즉, 사진이 재현의 완벽한 도구가 되면서 회화는 현실을 직시하는 사실주의 미술과 순간의 인상을 포착하는 인상주의 미술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셋째, 미술시장의 변화를 가져왔다. 즉, 사진 기술의 발달, 아카데미즘 미술의 퇴조, 화가의 자율성은 화상(갤러리)을 매개로 한 ‘미술시장’을 열게 된 것이다. 이처럼 미술에 대한 시선, 시대 감각, 미술 유통구조의 변화는 표현방식의 변화를 가져오면서 미학의 패러다임도 바꾸게 되었다. 이제 19세기 후반의 유럽은 ‘무엇을 보는가?’가 중요했던 사실주의 미술은 종언을 고하고 ‘어떻게 보는가?’ 또는 ‘어떻게 보이는가?’가 중요한 인상주의 미술을 예고하고 있었다.
정광균 칼럼니스트는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제19회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주토론토 총영사와 주이집트 대사를 역임하며 외교 현장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외교관 은퇴 후에는 학문의 길로 전환하여, 한양대학교 관광학과에서 DMZ 관광개발과 관광자원 분야를 연구하며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남서울대학교 관광경영학과 객원교수와 한양대학교 관광학과 및 국제관광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며 교육자로서도 활동했다. 현재는 추계예술대학교 대학원 문화예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서양미술사 분야의 학위를 준비 중이다. 동시에 한국미술협회 산하 일원회와 현대사생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화가로서도 활발히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필자는 외교관으로서의 국제적 시각, 관광학 전문가로서의 학술적 접근, 현장 예술가로서의 실제적 안목, 서양 미술사 연구자로서의 전문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러한 다면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단순한 여행기나 미술사 해설을 넘어서는 심도 있는 연재를 선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