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한한령 전면 해제에 거는 기대
롯데그룹 등 중국 관련 사업을 하던 한국업체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던 중국의 ‘한한령’(限韓令, 한류 제한령)이 전면 해제될 수 있다는 기대감이 고조되고 있다. 지난 3월부터 서서히 일부 한한령 해제 조짐이 나타나고 있는 데다 이재명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주석과 취임 첫 통화를 한 뒤 주한미군의 사드(THAAD) 배치 논란으로 얼어붙었던 한중관계에 훈풍이 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한한령은 중국정부가 사드 배치를 빌미로 한국에서 제작된 콘텐츠나 한국 연예인이 출연하는 광고 등의 송출을 2017년 초부터 금지시키면서 비롯됐다. 그래서 금한령(禁韓令, 한류 금지령)이라고도 불린다. 처음에는 한중 합작영화나 드라마에 출연 중인 한국 연예인들을 중도 하차시키거나 한국 작품의 수입금지 조치로 시작됐다.
이후 한국 상품에 대한 불매운동을 유도하고 중국에 진출한 한국업체에 불이익을 주는 행위로 확대됐다. 예컨대 한국 관광 제한, 한국산 화장품과 공기청정기, 비데 등의 공산품 수입 불허, 김치와 삼계탕 등 한국 특산식품의 검역 강화 및 수입 제한, 항공사들의 한국행 노선 중단, 동영상 플랫폼에 올라오는 한국 작품의 차단 등이 주된 내용이다. 당시 중국에서 롯데마트를 다수 운영하던 롯데그룹은 한한령으로 마트 영업이 어려워지자 모든 매장을 철수하는 등 중국에서의 유통사업을 사실상 모두 접기도 했다.
사드(THAAD) 배치로 얼어붙었던 한중관계에 훈풍 불 가능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정부는 공식적으로 ‘한한령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한한령이 중국 인민들의 자발적인 행동이라고 선을 그으면서 당국 차원의 조치는 없었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중국 당국의 심의나 허가를 받아야 하는 한국 컨텐츠의 중국 수출을 사실상 불허한 사례가 많았다. 심지어 중국의 한 고위 관리는 “소국이 대국에게 대항하면 되겠느냐”는 등 방자하기 그지없는 패권주의적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시 주석과의 첫 통화에서 “올해와 내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의장국인 두 나라가 긴밀히 협력하길 기대한다”면서 오는 10월 말 경주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에 시 주석을 초청했다. 시 주석이 이 초청을 수락한다면 양국 관계 회복에 중요한 전기가 마련될 것으로 기대된다.
중국은 미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을 계기로 한한령 해제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을 벌이는 듯하다. 지난 3월 봉준호 감독의 영화 ‘미키17’이 중국 전역에서 개봉됐고 4월부터 한국 가수들의 중국 공연이 8년 만에 재개됐다. 또한 같은 달 한국을 6년 만에 찾은 한중 청년교류 중국대표단 53명이 정부서울청사를 찾기도 하는 등 최근 들어 분위기가 급변하고 있다.
중국은 트럼프발 관세전쟁으로 국제사회에서 우군을 늘려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그렇기에 미국의 동맹이자 이웃 나라인 한국과의 관계 개선이 절실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상당수 전문가들은 시 주석의 방한이 성사될 경우 중국이 한한령을 확실하게 푸는 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미 백악관은 이러한 중국의 속사정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이 대통령 당선 직후 내놓은 첫 메시지에서 “한국이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치렀지만 미국은 전세계 민주주의 국가들에 대한 중국의 개입과 영향력 행사에 대해 여전히 우려하며 반대한다’는 이례적인 반응을 내놓았다.
또한 한국 대통령이 취임하면 24시간 이내에 미 대통령과 통화하는 것이 관례다. 심지어 한덕수 총리도 대통령 권한대행 부임 당일 트럼프와 통화했다. 그런데도 양 정상 간 첫 통화는 이 정부가 출범한 지 이틀이 지나도록 지연되다가 사흘째에야 성사됐다. 미중 간의 갈등을 둘러싼 미묘한 뉘앙스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나온다.
미중 고래싸움 와중에 임기응변식 줄타기외교보다 실용외교 펼쳐야
그런 점에서 미국 앞에선 미국에 순응하고, 중국 앞에선 중국에 영합하는 임기응변식 줄타기 외교는 불신을 자초할 가능성이 높다.
아니나 다를까 피트 헤그세스 미 국방장관은 최근 싱가포르에서 열린 상그릴라 아시아 안보회의에서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이른바 ‘안미경중(安美經中)’노선을 추구하지 말라고 경고를 날렸다. 이 경고에는 안보와 경제 모두 중국 억제 전선에 적극 동참하라는 다그침이 깔려있다. 반면에 시 주석은 “상호 핵심 이익과 중대한 우려를 존중하라”고 압박했다. 두 열강의 이러한 고래싸움 와중에 이 대통령의 실용외교가 어떻게 펼쳐질지 자못 궁금하다.
박현채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