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실용외교, 이념 넘어 국익으로 가는 길
이전 여러 정부들도 부분적으로는 실용외교를 표방해왔고 이번에 이재명 대통령도 취임연설에서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를 통해 글로벌 경제·안보 환경 대전환의 위기를 국익 극대화의 기회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우리 외교에서 실용외교라는 슬로건이 들어온 지가 오래되나 그 개념의 구체적 속성에 대해서는 다들 생소한 편이다. 막연하게 우리의 실리를 잘 챙기는 거래적 외교, 또는 눈앞의 이익을 따라 입장을 바꾸는 기회주의적 외교를 실용외교로 잘못 인식하는 경우도 있다. 본격적으로 ‘국익 중심 실용주의 외교’를 표방하는 현 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실용주의의 의미와 실용외교가 가야 할 길을 짚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실용주의는 미국의 생활철학인 프래그마티즘(Pragmatism)에 그 사상적 기반을 두고 있다. 미국 실용주의는 사상이나 이론의 주장보다는 그것이 실제로 어떤 유익한 결과를 낳느냐에 따라 그 사상과 이론의 가치를 판단하는 사조를 말한다. 관념적으로 그럴듯해도 실생활에 적용해서 유의미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으면 그 가치를 별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의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과도 상통하는데, 생활 속 사실에 입각해 문제를 분석하고 답을 찾아내는 태도를 말한다. 중국의 개혁개방시대 지도자인 덩샤오핑이 말한 ‘흑묘백묘론’, 즉 ‘고양이는 쥐만 잘 잡으면 되지 색깔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실용주의를 압축적으로 설명한다.
국익 맞게 외교정책을 창의적으로 변경해야
이 실용주의를 외교에 적용하면 실용외교가 되는데 그러면 실용외교가 가야 할 길은 어떤 길인지를 따져봐야 한다. 출발점부터 나갈 길은 분명히 해둬야 가다가 길을 잃지 않는다. 지금과 같은 국제정세 대변환기에 ‘전략적 모호성’이란 개념으로 어느 쪽의 길도 미리 정해두지 않고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는 것을 실용주의라 착각해서도 안된다.
실용외교에서는 이념이나 명분을 외교정책 결정과정에서 가급적 배제해야 한다. 이념과 감성이 가리키는 방향은 항상 정해져 있어 변화하는 환경에 부합하지 않게 되고 결국 국익에 맞지 않은 선택을 하게 만든다.
실용외교는 항상 국익에 닻을 내린 채 이뤄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강한 물살에 떠밀려 다니는 수동적 외교로 전락하게 된다. 우리의 국익이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먼저 세워져야 한다. 국익의 3대 요소를 우선순위별로 나열하자면 생존과 번영, 가치창달이다. 3대 요소 중에서 서로 상충하는 지점이 생기면 그 우선순위에 따라 선택을 하는 것이 실용외교다.
실용외교가 거래적 외교로 혼동되어 경제적 이익이 있으면 생존, 즉 안보적 이익을 희생해도 좋다고 본다면 이는 큰 착각이다. 그리고 국익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국익을 주관적으로 규정하면서 자기 잣대로 이를 재단하려 한다. 그러나 국익은 국가 정체성과 목표가 주변국의 국가이익과 부딪히는 길항관계에서 도출되는 것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규정이 가능하다.
실용외교는 변화하는 상황을 면밀히 주시하고 국익에 맞게 정책을 창의적으로 변경해 나가야 한다. 과거답습적 행태나 정태적 상황인식은 실용외교에서는 금물이다. 국제정세는 날로 변화하므로 그 동향을 거시적으로 잘 파악하고 이에 따라 우리 정책을 미시적으로 조절해 나가야 한다. ‘안미경중’과 같은 고식적인 슬로건으로 버틸 게 아니라 마치 압력밸브를 조정하듯 좌우로 정책배합의 손잡이를 미세하게 돌려야 한다. 이분법적인 선택을 미리 할 것이 아니라 장기적 조망을 하면서 계속 동태적으로 조절해 나가야 한다.
실용외교에서는 상대와 자신에 대한 과신도 금물이고 과소평가도 위험하다. 냉혹한 국제정치에 있어 상대의 선의를 너무 기대하거나 상대를 너무 우습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우리를 또한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국제적 위상에 맞는, 즉 우리 체형에 맞는 ‘실치수 외교(life size diplomacy)’를 해야 한다.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맞는 동태적 조절
실용외교는 원칙외교와는 반대되지만 그렇다고 원칙을 버리지 말고 그 밑에 깔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남이 흔들 수 없는 외교가 된다. 결국 실용외교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결과로 말해야 한다.
실용외교의 모범을 보려면 호주나 베트남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 두 국가는 미중 양측에 다 많이 의존하지만 전략적 자율성을 잘 유지하며 양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 나가고 있다. 이번에 G7 회의에서 한호 양 정상이 만났는데 앞으로 전략적 대화를 더 긴밀히 해서 배울 점은 배워야 한다. 이 정부 실용외교의 성적표가 시간이 지난 후 좋게 나올 것을 기대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