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한국전쟁 75주년, ‘평화’의 의미
해방과 동시에 미국과 소련(러시아)의 분할 점령으로 분단된 한민족의 지난한 역사는 동족상잔의 비극까지 겪으며 오늘로 이어졌다. 한국전쟁은 정전협정으로 임시 봉합된 채 민족 간 대립과 반목은 ‘한반도리스크’의 원천이 되고 있다.
한때 김대중-김정일, 노무현-김정일, 문재인-김정은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북미 간에도 김정은-트럼프 정상회담이 열려 화해·협력의 길이 트이나 싶었으나 끝내 고비를 넘지 못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적대적 두 국가론’을 펴며 대화의 문을 아예 닫아버렸다.
탄핵으로 쫓겨난 윤석열 전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대북강경론을 펴며 대결을 부추겼다. 한·미·일군사공조를 앞세우며 대북압박 공세를 높여 군사적 긴장도를 높였다.
남북대화 당장 어려우나 꾸준히 신뢰 쌓으면 기회 올 것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아무리 비싼 평화도 전쟁보다 낫다”며 “싸워서 이기는 것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낫고, 싸울 필요 없는 평화가 가장 확실한 안보”라고 강조했다. 이념보다는 국익우선 ‘실용’을 내세웠다.
통일외교안보라인도 남북대결보다는 대화와 협력을 주장해온 인사들로 채웠다. 이종석 국가정보원장과 정동영 통일부장관 지명자는 노무현 대통령 시기 남북대화 경험이 많고 누구보다 북한을 잘 아는 인사들이다. 친위쿠데타에 동원된 군대를 효과적으로 추스르고 개혁해야 할 막중한 책임이 부여된 국방부장관으론 군장성 출신이 아닌 문민 안규백 의원을 지명했다. 정통 외교관료 출신인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이나 조 현 외교부장관 지명자도 대화를 중시하는 인물들로 균형을 맞췄다.
전체적인 한반도 안보지형은 낙관을 불허한다. 빗장을 굳게 걸어 잠근 북한은 당분간 일체의 대화에 응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 대통령이 대북 확성기방송 중단을 지시하고 북도 즉각 대남방송 중단으로 응답해 접경지대 주민들을 괴롭히던 소음이 사라졌다. 다행이다. 그러나 ‘적대적 두 국가론’을 주창한 북한이 본격적인 대화에 나서기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북한은 러시아와 ‘준군사동맹’을 맺고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규모 파병까지 한 상태다.
언제라도 대화할 태세를 갖추고 분위기를 만들어가되 조급하게 서둔다고 될 일은 아니다. 한반도에서 군사적 불안을 야기하지 않도록 관리하고 평화를 유지하면서 신뢰를 쌓아가는 것이 한 방책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적 지경학적 환경은 우리 안보가 남북 뿐 아니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강국과의 관계 설정에 직접적 연관이 있음을 보여준다. 한미군사동맹을 토대로 미국과의 관계를 다지고 일본과 협력하며, 경제적으로 밀접한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러시아와 척지는 상황도 막아야 한다.
중국이나 러시아는 남북대화를 촉진하는데 건설적 역할을 할 수 있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서 경제강국, 군사강국에 더해 문화강국으로 발돋움하는 우리 위상을 고려하면 노력 여하에 따라 전세계로 뻗어가는 외교역량을 발휘할 터전이 조성돼 있다.
G7정상회의에 참석해 일본 영국 캐나다 유럽연합 등 9차례 정상회담을 하며 성공적인 상견례를 했고, 특히 브릭스(BRICS)나 글로벌사우스(Global South) 등에서 영향력이 큰 브라질 인도 남아공 호주 멕시코 정상들과는 개인적 친밀감이 더해져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달라진 대한민국의 위상을 실감나게 했다.
시민들이 맨손으로 친위쿠데타를 물리친 ‘경이로운 저항’과 ‘놀라운 민주주의 회복력’이야말로 무엇보다 가치 있고 빛나는 외교활동의 정수다. 이들과의 친밀감을 살려 경제적으로 상호 윈-윈할 디딤돌을 놓는 한편 오는 10월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때 역내 국가들과의 외교지평을 넓히면 우리 위상을 더욱 높일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특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참석이 예정돼 있어 기대감을 높인다.
시민 힘으로 쿠데타 물리치고 민주주의 회복한 저력이 ‘진정한 외교’의 정수
물론 당장 눈앞에 닥친 어려움은 크다. 트럼프 대통령과의 지난한 관세협상, 국방비와 주한미군주둔비 인상 압박 등 풀어야 할 난제가 많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우리는 세계 각국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변방의 초라한 국가였다. 이제 남한테 도움을 주고 부러움을 사는 국가로 성장했다. 남북의 화해협력으로 한반도평화를 굳힐 수 있다면 한층 더 큰 꿈도 꿀 수 있을 것이다.
이원섭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