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주의 미술은 빛과 순간을 포착한 시각 혁명이었다
정광균의 80일간 유럽미술관 산책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 모던미술과 명작 이야기 (12)
필자는 ‘나 홀로 자유여행’으로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던 ‘80일간의 유럽미술 여행’을 다녀왔다. 유럽 12개국의 주요 미술관과 거장들의 개별미술관 순례 경험을 바탕으로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 모던 미술과 명작이야기’를 미술사적, 인문학적 견지에서 재조명해본다. 지금까지는 15세기 이후 르네상스, 매너리즘 미술에 이어 17~18세기의 바로크, 로코코 미술, 18~19세기의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미술을 살펴보았다. 미술은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중세의 붕괴로 신 중심의 미술은 인간중심의 르네상스 미술로 전환되었으며 종교개혁과 대서양 시대는 유럽의 세력 판도와 미술의 지형을 바꿔놓았다. 구교국가이면서 르네상스를 꽃피운 이탈리아, 대항해시대 해양 강국인 스페인, 절대왕정 국가인 프랑스, 신교국가이면서 신흥 해상강국인 네덜란드는 각국이 처한 상황에 따라 교황, 국왕, 귀족, 시민 계급 중심의 미술을 구현했다. 18~19세기 프랑스대혁명, 산업혁명으로 유럽은 근대사회로 전환되었으며 이 시기에 나타난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 미술은 이성, 감성, 현실이라는 본질을 강조하면서 근대미술의 지평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들어 약 500년간 지속된 ‘고전미술’은 균열, 해체, 붕괴로 이어지면서 종언을 고하고 ‘코페르니쿠스’적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제 모더니즘‘ 미술의 서곡인 인상주의 미술을 살펴본다.
인상주의(Impressionism) 미술은 19세기 후반 사실주의 미술에 이어 프랑스에서 나타난 미술사조다. 1839년 ‘다게레오타이프’ 사진술의 발명은 회화의 정체성에 의문을 던져 주었다. 인간의 ‘눈’에 도전하는 ‘렌즈’가 출현함으로써 재현시장의 판도가 바뀐 것이다. 이제 재현의 주도권을 잃게 된 회화는 두가지 방향에서 답을 찾게 된다. 1850~60년대의 사실주의 미술은 ‘보이는 그대로’의 민중의 삶에서 1870~80년대의 인상주의 미술은 ‘보는 방식’에서 존재가치를 찾게 되었다. 사실주의는 민중의 현실을 직시한 시각 메시지였고 인상주의는 ‘빛과 순간’의 인상을 포착한 시각 이미지였다. 즉, 보는 관점은 다르지만 두 미술은 모두 ‘시각언어’였다. 그러나 사실주의 미술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인상주의는 ‘보는 방식’ 자체를 바꾼 것이기에 회화의 ‘시각 혁명’이었다.
이렇게 사진은 인상주의의 탄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미술사 속에서는 하나의 사건에 불과했다. 단지 인상주의의 태동을 앞당기는 ‘촉진제’였다. 그 기저에는 프랑스대혁명과 산업혁명에 따른 시대환경의 변화, 근대철학, 미학의 발전, 화가의 주체성 등과 같은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했다. 혼돈상태는 질서 속의 무질서, 무질서 속의 질서가 공존한다. 기득권 세력과 저항 세력의 싸움이다. 토인비는 역사의 발전을 위기의 도전에 대한 문명의 응전으로 비유했다.
사조의 발전도 크게 다르지 않다. 19세기 후반까지 프랑스 미술은 신고전주의 풍의 아카데미즘 미술이 주류였다. 파리화단은 소위 ‘그들만의 리그’였다. 낭만주의, 사실주의 미술은 여전히 기득권 세력인 고전미술에 저항하는 비주류였다. 그 과정에서 사진은 도전의 ‘촉매제’였으며 인상주의는 응전이었다. 이렇게 등장한 인상주의 미술도 초기에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고전주의 항로’를 벗어나 ‘모더니즘’이라는 미지의 바다를 향해 과감한 항해를 시작한 것이다.
인상주의는 아카데미즘 미술에 저항하면서 붓질과 채색의 해방을 추구
프랑스 인상주의 미술의 구체적 배경과 특징은 어떠한가? 인상주의의 탄생은 두 가지 사건에서 비롯된다. 1863년 아카데미즘의 상징인 살롱전이 작품을 대량으로 낙선시키자 나폴레옹 3세는 화가와 대중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낙선 전’을 허용했다. 이때 전시된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은 큰 파란을 일으킨다. 그 이후 10년이 지난 1874년 모네, 르누아르, 드가, 시슬레 등은 살롱전에 대한 반발과 자립을 위해 그들만의 제1회 독립전시회를 개최했다.
그때 모네의 ‘인상, 해돋이’를 본 비평가 루이 르루아가 “벽지가 더 완성도가 있겠다. 어째서 이런 스케치를 전시하는가? 인상이라고? 그렇다면 인상주의자들이군!”이라고 조롱한 말이 신문에 실리면서 인상주의로 불리게 된 것이다. 화가들은 처음에 이 말을 받아들이길 거부했지만 결국은 수용하면서 인상주의 미술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상주의는 바닷속 조류의 흐름처럼 다층적인 배경이 작용하였다. 첫째, 낭만주의, 사실주의로부터 불기 시작한 ‘예술의 민주화’ 바람이다. 이는 고전주의 미술의 균열을 가져왔다. 둘째, 1841년 미국의 화가 존 랜드가 발명한 튜브 (납, 주석) 물감의 보급과 기차, 철도의 발달이다. 이는 화가들이 손쉽게 교외로 나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만들었다. 셋째, 화랑(갤러리), 비평가, 컬렉터의 부상과 여가문화의 확산이다. 이는 화가들의 창작 의욕과 그림 판매를 제고시켰다. 넷째, 1854년 일본 개항 이후 도자기, 공예, 우키요에(목판화, 포장지 그림)의 유럽 수입에 따른 ‘자포니즘(Japonism, 일본풍)’ 영향이다. 이는 화가들에게 새로운 시각 세계를 눈뜨게 하였다. 이렇게 아카데미즘 미술에 대한 조용한 반란으로 시작된 인상주의 미술은 고전미술의 규범에서 벗어나 ‘붓질과 채색’의 해방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인상주의 미술은 외광파 화가들이 추구한 감각과 찰나의 미학
필자는 지난해 여름 6월 11일부터 18일간 파리의 오르세, 오랑주리, 마르모탕, 몽마르트 미술관, 파리 근교의 지베르니 정원, 시슬레 마을 등을 방문하면서 인상주의 미술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미술은 한국 사람들이 특히 좋아한다. 미술 교과서, TV, 전시회를 통해 자주 접해왔고 직관적으로 감상하기 쉬우며 따뜻한 색감과 감성적 분위기가 우리의 정서와 맞닿기 때문이다.
고전미술은 비교적 무겁고 묵직하며 어둡지만 인상주의 미술이 산뜻하고 경쾌하며 밝게 느껴지는 것은 야외에서 그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상주의 화가들은 ‘외광파’로 불린다. 즉, 자연광 아래서 그림을 그린 화가들이라는 뜻이다. ‘빛과 순간’을 포착한 ‘감각과 찰나’의 미학을 잘 읽는 것은 감상 포인트가 된다.
오르세미술관은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미술의 핵심 공간이다. 그곳에 가면 마네, 모네, 르누아르, 드가, 시슬레, 피사로 등 인상주의 대가들의 명작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다. 5층의 자연광이 들어오는 유리 돔 아래 전시된 걸작들은 자연광 속에서 감상하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오랑주리 미술관 1층에는 모네의 ‘수련’ 대작 8점이 타원형 전시실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전시실 전체가 하나의 작품이다. 모네가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기념하여 ‘평화의 성소’라는 컨셉하에 국가에 기증한 것이다.
1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클레망소 총리를 친구로 둔 덕분이지만 프랑스 내 모네의 위상을 보여준다. 파리 근교의 ‘지베르니 정원’은 모네가 바로 그 수련을 그렸던 곳이다. 마을 사람들에게 농사 환경을 망친다고 욕을 먹으면서도 손수 만든 정원과 연못, 일본풍 다리, 집안에 차고 넘치는 우키요에 그림은 그가 얼마나 자포니즘에 빠져있었는지를 말해준다. 한편, 일명 ‘시슬레 마을’로 불리는 퐁텐블로 숲 인근의 ‘모레 쉬르 루앙’ 마을은 시슬레가 20년간 살면서 이곳저곳을 배경으로 인상주의 그림을 그린 곳이다. 물레방아 간을 끼고 도는 아름다운 루앙 강, 모레 다리, 버드나무 등이 멋진 평화로운 중세마을 분위기는 언젠가 다시오면 강가에서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은 인상주의 미술을 예고하는 서막
이제 인상주의 대가들의 명작을 살펴본다. 인상주의 화가 중 자신은 결코 인상주의가 아니라고 하면서, 인상주의 화가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며 인상주의의 문을 연 화가가 있다. 에두아르 마네(1832~1883)다. 그렇다. 마네는 ‘인상주의인 듯, 인상주의 아닌, 인상주의 같은’ 화가였다. 그는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류하면서도 제도권 미술의 등용문인 살롱전을 통해 인정받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림만큼은 아방가르드 정신을 담으려 했기에 8살 아래의 모네도 깊이 존경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구시대와 신시대 사이의 가교였던 셈이다.
마네는 파리의 부유한 가정 출신으로 법관인 아버지는 아들이 법조계에 종사하기를 바랐으나 공부는 그다지 잘하는 편이 못되어 삼촌의 독려와 도움으로 루브르 박물관의 걸작들을 보면서 그림을 배웠다고 한다. 1863년 낙선 전에 전시된 ‘풀밭 위의 점심’은 파리를 발칵 뒤집어 놓는다. 이 일로 인해 그의 주변에는 비주류인 인상파 화가들이 모이게 되었으며 마네의 집 근처 바티뇰 지역의 카페 ‘게르브아’는 그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그러나 마네 자신은 그들과 친교 이상의 의미는 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남긴 ‘올랭피아’ ‘피리 부는 소년’ ‘폴리 베르제르 바’ 작품 등에서 인상주의 특징이 그다지 뚜렷하지 않은 점은 이를 말해준다.
오르세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풀밭 위의 점심(1863)’은 인상주의의 문을 연 그의 대표작(그림 1)이다. 그림은 숲속에서 두 명의 정장을 한 부르주아 남성과 완전 나체의 여성 한명이 대화하는 장면이다. 서로 대화하는 것 같은데 나체의 여성이 관객을 빤히 쳐다보는 듯한 시선은 도발적이다. 배경으로 속옷만 입고 물놀이하는 여성, 전경의 벗은 옷가지, 흐트러진 과일 바구니도 무엇인가를 암시하듯 외설적이다. ‘올랭피아(1863)’ 작품처럼 나체의 여성이 매춘부가 아니냐는 논란을 불러일으킨 경악할 만한 그림이었다. 실제는 마네의 뮤즈이자 모델이었다고 하는데 마네의 의도된 설정으로 추측된다.
마네는 현실과 회화의 경계를 흔들면서 불편한 진실을 그림 속에 과감하게 끌어들인 것이다. 두 작품 모두 같은 해여서 마네의 대담한 ‘스캔들 전략’인가? 라는 의문도 든다. 아무튼 이 작품은 삼각형 구도지만 원근법은 어색하고 공간처리는 평면적이다. 뚜렷한 윤곽선, 평평한 명암, 실내 광이라 밋밋한 신체 묘사는 아직 인상주의 화풍이 아니다. 그러나 고전의 틀을 깨면서 동시대인의 일상을 주제로 삼고 감각적인 붓질과 색채를 시도한 것은 파격이었다. 그는 말년에는 매독 합병증으로 손과 발이 마비되고 다리까지 절단하는 고통 끝에 51세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기존의 관습과 타협하지 않고 기꺼이 충돌을 선택한 ‘아방가르드 정신’은 인상주의 미술의 도래를 알리는 서막이었다.
모네의 인상, 해돋이는 인상주의 미술의 기념비적 걸작
인상주의 미술의 창시자이며, 개척자는 클로드 모네(1840~1926)다. 그는 파리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센 강의 하구이면서 프랑스 제2의 항구도시인 르아브르에서 성장했다. 그곳에서 마네는 화가 부뎅으로부터 그림을 배우면서 일찍이 야외 사생에 눈을 떴다. 이는 ‘빛의 화가’가 된 모네에게 행운이었고 노르망디 센강 위의 빛은 그의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59년 파리로 이주한 모네는 살롱전에 좌절감을 느끼고 있던 마네, 르누아르, 피사로, 시슬레 등과 어울리면서 신 미술 창조를 위해 의기투합했다. 그 과정에서 모네는 마네의 밝은 화풍에 깊은 영향을 받고 풍경에 빛을 담아내기 위해 야외 광선묘사에 진력했다.
영국의 시인 바이런이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 나는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라고 말한 것처럼 모네도 1874년 ‘인상, 해돋이’가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면서 갑자기 유명인사가 된 것이다. 제목도 없이 출품해서 전시관계자가 묻는 말에 “그냥 ‘인상(impression)’이라고 하지요”라고 답을 한것이 지금의 제목이 되었다고 하니 모네 자신도 완성작이라고 말하기는 좀 겸연쩍었던 모양이다. 영국 옥스퍼드 사전에서도 실린 대박이란 말은 이럴 때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인상, 해돋이(1872)’를 살펴본다(그림 2). 이 작품은 마네의 고향인 르아브르항구의 안개 속 해돋이 광경을 그린 것이다. 바다 위의 붉은 해, 배, 연기, 안개, 수면의 반사광을 색 덩어리 형태로 세부는 생략하고 빠른 붓 터치로 그려서 몽환적이다. 어딘지 영국의 낭만주의(전 전편 게재) 화가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와 유사한 느낌을 준다. 모네가 1871년 보-불 전쟁 당시 런던으로 피신했을 때 터너의 ‘빛을 그리는 방식’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하니 영감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항구 풍경으로 석양과 해돋이라는 차이점은 있으나 대기와 빛의 순간적 인상을 그린 점은 공통적이다. 그 이후 모네는 ‘건초더미(1890~1891)’ ‘루앙 대성당(1892~1894)’ ‘국회의사당(1900~1904)’ 등의 연작 시리즈를 발표한다. 노력 끝에 빛을 본다고 모네는 드디어 ‘빛의 화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모네는 단순히 ‘빛의 화가’로 불리기엔 부족한 집요한 탐구자였다. 그는 연작 시리즈를 계절, 날씨. 시간대별로 빛의 변화에 따라 수십 번씩 반복해서 그렸으며 빛의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배 위의 수상 화실을 활용하고 1883년 지베르니에 정착한 이후에는 인공정원을 조성해서 30여 년간 수련 작품(1899~1926)을 무려 250여점이나 남겼다. 모네에게 지베르니 정원은 그야말로 ‘살아있는 빛의 실험장’이었다. 말년에는 백내장으로 시력을 거의 잃은 상태에서도 폐암으로 86세로 죽기 전까지 오랑주리 미술관의 수련을 그렸다고 하니 모네의 삶은 ‘빛의 대장정’이라 하겠다.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는 인상주의 집단초상화의 걸작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도 한국 사람들이 특히 좋아하는 인상주의 대가다. 그는 따뜻한 색감으로 여성, 발레리나, 피리의 일상 등을 감미롭게 그린 ‘색채의 마술사’였으며 “고통스러운 그림은 그리고 싶지 않다”라고 말할 정도로 ‘행복을 그린 화가’였다. 르누아르는 프랑스 리모주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4세 때 파리로 이주하여 소년공 생활을 하다 1862년 파리 국립미술학교에 입학하여 미술 수업을 받았다.
화가가 된 이후 초기에는 쿠르베, 마네 등의 영향을 받아 사실주의 그림을 그렸으나 모네, 시슬레, 바지유 등과 교류하면서는 인상주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후반에는 인상주의의 과도한 즉흥성에 회의를 느껴 라파엘로, 앵그르 등 고전화가들의 작품을 연구하면서 인물화 특히, 여성 누드화에서 독보적인 세계를 구축했다. 그러나 색채의 서정성과 따뜻함은 유지하면서 ‘피아노 앞의 소녀들’ ‘도시의 무도회’ ‘보트를 젖는 사람들’ ‘목욕하는 여인들’ ‘앉아있는 누드’ 등의 명작을 남겼다.
오르세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1876)’는 그의 대표작이다(그림 3). 르누아르가 몽마르트 언덕 근처에 살면서 물랭 드 라 갈레트 야외무도회장을 배경으로 시민들의 활기찬 일상을 그린 것이다. 나뭇잎 사이로 비친 햇빛, 반사광에 비친 사람들의 얼굴, 춤추는 인물들의 생동감은 인상주의적 특징이다. 빛, 색, 인간의 따뜻함을 잘 녹여낸 걸작으로 인상주의 집단초상화로서는 최고의 명작이다.
여담이지만 당시의 물랭 드 라 갈레트의 풍차 일부는 현재의 레스토랑 옥상에 선전용으로 보존되어 있으나 당시의 야외정원(무도회장)은 현재의 식당 터가 많이 축소되어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한다. 남프랑스 니스 근처의 ‘르누아르 하우스’에 가면 그의 마지막 삶을 읽을 수 있다. 78세 생애를 마칠 때까지 류머티즘 관절염으로 손가락이 굳어 손에 붓을 묶고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화실 안의 큰 이젤과 휠체어는 르누아르의 투혼과 ‘화가 정신’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드가의 발레 수업은 동작의 순간을 포착한 인상주의 명작
인상주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이지만 에드가르 드가(1834~1917)는 독자적인 길을 걸은 대가였다. 즉, 모네, 르누아르 등이 ‘빛의 순간’을 포착했다면, 드가는 ‘동작의 순간’을 포착했다. 그가 남긴 명작 중 ‘발레 수업’ ‘무대 위의 발레리나’ ‘관람석 앞의 경주마’ 등은 발레리나, 경마 기수 등과 같이 움직이는 동체의 순간을 묘사한 인상주의 작품이다. 그러나 ‘압생트’ ‘목욕 후 목덜미를 닦는 여인’ 등은 낭만주의, 또는 사실주의풍 작품이다.
드가는 파리의 부유한 가정 출신으로 파리대학 법학부를 중퇴하고 1855년 국립미술학교에 입학하여 미술을 배운 후 화가의 길을 걸었다. 예술에 대한 열정이 법대를 중퇴한 후 화가의 길을 걸은 세잔과 같다. 초기에는 역사 화가가 되길 원했으나 1873년 인상주의 화가들과 뒤늦게 교류하면서 인상주의 첫 전시회에도 참여하며 핵심 일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예민하고 까칠한 성격으로 마네, 모네, 르누아르 등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과 원만하게 지내지 못했으며 “나는 공기를 그리지 않는다”라며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지 않다 보니 인상주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드가의 대표작은 오르세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발레 수업(1874)’이다(그림4). 무용 연습실을 배경으로 발레 교사의 지휘하에 발레리나들의 연습, 예비동작, 휴식하는 모습 등을 스냅사진처럼 섬세하게 그린 것이다. 비대칭적 구도하에서 발레리나의 ‘찰나적 순간’을 포착한 것은 인상주의적 시선이다. 하지만 무대 위의 화려한 극적 장면보다 무대 뒤에서 연습하는 발레리나의 실상을 조명한 것은 근대도시 속 예술노동자의 삶을 알리려는 사실주의적 시선이다.
아쉽게도 화가로서의 삶과 개인적인 삶은 명암이 엇갈렸다. 어린 시절 모친과 숙부의 외도를 지켜본 상처로 인한 여성혐오로 평생 독신으로 산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인상주의 그림은 ‘자연의 빛’보다는 ‘동작의 순간’을 예리하게 포착했다는 점에서 미술사 속에서 특별한 조명을 받고 있다.
인상주의 미술은 회화의 보는 방식을 바꾼 모더니즘 미술의 서곡
이렇게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나타난 인상주의 미술은 표면적으로는 사실주의 미술에 대한 반작용이었으나 내면적으로는 르네상스 이후 약 500년간 지속된 고전미술의 뿌리를 뒤흔드는 반동이었다. 즉, 제도권 미술인 아카데미즘에 대한 조용한 반란으로 시작되었지만 ‘감각과 찰나’의 미학을 바탕으로 빛과 순간을 포착한 ‘시각 혁명’이었다. 그렇기에 곰브리치는 ‘서양미술사’에서 인상주의 이후의 미술을 두고 ‘과거와의 단절’이라고 주장했다. 이 점에서 인상주의 미술은 몇 가지 시사점을 남긴다.
첫째, 인상주의는 회화의 ‘보는 방식’을 바꾼 근대미술의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둘째, 시각언어가 어떻게 감각과 일상을 예술로 전환하는가를 보여준 미술이었다. 셋째, 감각은 ‘형(형태)과 색(채색)’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고전주의 시각 체계를 더욱 흔들게 되었다. 즉, 인상주의 미술은 고흐, 고갱, 세잔 등의 후기 인상주의, 표현주의 미술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그렇다. 인상주의 미술은 더욱 균열을 내며 무너져 가는 고전미술의 종언을 예고하는 모더니즘 미술의 서곡이었다. 이제 인상주의 미술은 내면적 표현에 한계가 있다는 비판에 직면하면서 주제, 구조, 색채, 표현기법이 확대되는 후기 인상주의 미술에 자리를 내어 주게 된다.
정광균 칼럼니스트는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제19회 외무고시에 합격하여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주토론토 총영사와 주이집트 대사를 역임하며 외교 현장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외교관 은퇴 후에는 학문의 길로 전환하여, 한양대학교 관광학과에서 DMZ 관광개발과 관광자원 분야를 연구하며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남서울대학교 관광경영학과 객원교수와 한양대학교 관광학과 및 국제관광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며 교육자로서도 활동했다. 현재는 추계예술대학교 대학원 문화예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서양미술사 분야의 학위를 준비 중이다. 동시에 한국미술협회 산하 일원회와 현대사생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화가로서도 활발히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필자는 외교관으로서의 국제적 시각, 관광학 전문가로서의 학술적 접근, 현장 예술가로서의 실제적 안목, 서양 미술사 연구자로서의 전문성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러한 다면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단순한 여행기나 미술사 해설을 넘어서는 심도 있는 연재를 선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