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규 칼럼

무너진 과학기술 현장 되살릴 방법은

2025-07-16 13:00:02 게재

‘히스테리시스’란 말이 있다. 신경질이나 짜증을 쉽게 내는 사람에게 흔히들 사용하는 ‘히스테리’와는 다른 말이다. 히스테리시스는 자성체가 외부 자기장을 제거해도 원래 있던 상태로 돌아오지 못하고 계속 자기를 띄는 현상을 부르는 물리학 용어다. 우리말로 바꾸면 ‘과거 이력 의존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과학입국의 기치를 두고 반세기 이상 온 국민이 힘을 합쳐 노력한 결과로 만들어졌다. 철강 조선 석유화학 기계 자동차를 중심으로 한 중화학공업에서부터 반도체 스마트폰 디스플레이로 연결되는 첨단기술까지 과학기술은 대한민국 경제성장의 심장이었다.

심장은 얼핏 보면 그냥 내버려둬도 스스로 뛰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람의 심장이 뛰기 위해 산소와 포도당을 실어 나를 혈류 공급이 필요하고, 규칙적이고 안정적인 전기신호도 필요하다. 한 국가의 과학기술도 마찬가지다. 제대로 된 연구개발이 이루어지려면 피와 같은 예산 투입이 필요하고, 안정적인 젊은 연구자들의 수급이 이루어져야 한다.

2022년 말 윤석열정부는 뜬금없이 카이스트를 포함한 4개의 과학기술원을 과기부에서 빼서 교육부 산하로 옮기는 시도를 한다. 하지만 큰 반대에 부딪히자 과기계가 정부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인식은 몇몇 과학계 원로와의 만남 이후 ‘카르텔의 반발’로 발전했고 끝내 ‘R&D 예산을 20% 삭감하라’는 명령(?)에 이르게 된다.

2023년 6월 말까지 제출돼야 했던 2024년도 국가연구개발사업 예산안은 하루를 남겨 놓고 원점에서부터 재검토에 들어갔고 31조원에 달했던 예산은 순식간에 26조원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1억원 미만 개인 기초연구는 아예 사라지고 젊은 연구자들을 위한 신진 연구도 대폭 줄었다. 교육부도 덩달아 연구개발 예산을 26%나 삭감했다.

과학기술계는 시급히 예산을 복원해달라고 호소했지만 정부의 2025년 예산은 24조7000억원으로 더 줄어들었다.

예산 삭감이 불러온 연구 현장의 붕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계의 목소리는 국민들에게 제대로 전달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의대 정원 확대로 촉발된 의정 갈등으로 의료체계가 붕괴되고 있었고, 계엄과 탄핵이란 핵폭탄급 이슈가 연쇄반응처럼 터지고 있었으니, 과기계의 호소가 들릴 리가 없었다.

사실 예산 삭감 자체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예산 배분의 문제다. 2025년도 연구개발예산을 보자. 국가의 혁신을 견인하겠다고 AI반도체 바이오 양자 등 몇몇 사업에 4조5000억원의 예산이 배정돼 있다. 아울러 이차전지 시스템반도체 디스플레이 원자력 등 몇몇 혁신전략기술에 7조원을 배정하고, 국방과 재난안전에 5조원을 할당하고 있다.

전체 연구개발 예산은 삭감되었지만 소위 12대 국가전략기술에 해당하는 예산은 오히려 늘어났다고 볼 수 있다. 전략기술에 관련된 연구는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연구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기초연구에 투입되는 예산은 어떻게 됐을까. 2025년 국가연구개발 예산 중 명목상 기초연구로 분류되는 예산은 약 2조9000억원 정도다. 수치만 봤을 때는 2023년도가 3조1000억원이니 크게 줄어 든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과거 기초연구에는 연구자들이 자율적으로 연구주제를 도출해 예산을 신청하는 바텀-업(Bottom-up) 시스템이 잘 정착돼 있었다. 그러던 것이 기초연구에도 국가전략기술이란 잣대를 들이대기 시작한 것이다. 귀에도 생소한 미들-업(Middle-up) 시스템의 도입이었다. 결국 기초연구마저도 국가전략기술에 투자하는 중복지원의 형태가 되었고 순수 기초연구나 신진 연구자를 위한 예산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기초연구는 예산만으로 회복 안돼

지금 과기부는 2026년 국가연구개발예산안을 만들고 있다. 전년 대비 5.1%를 증액한 26조1000억원이 책정됐다고 한다. 하지만 2023년 31조원의 예산에 비교하면 여전히 5조원이나 작은 규모다. 예산의 절대 규모보다 더 큰 문제는 모두에 지적한 ‘히스테리시스’ 현상에 있다.

2024년과 2025년 두 해에 거쳐 가장 큰 피해를 본 기초연구는 예산이 원상복구된다고 연구현장이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막연히 기다린다고 떠나간 인재들이 돌아오지도 않을 것이다.

그럼 연구원 엔지니어 그리고 대학원생을 다시 연구현장으로 불러들일 방법은 전혀 없을까? 히스테리시스 곡선을 보면 답은 한가지 뿐이다. 삭감한 20%의 예산을 단순히 복원해서는 안되고, 원래의 예산에 20%를 더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산을 31조원으로 원상복구하는 것을 넘어 36조원으로 대폭 증액해야 된다는 얘기다.

한번 시스템을 망가뜨리면 원상으로 돌아오는 것이 이렇게 힘들다는 것을 위정자들은 깨달아야 한다.

박인규 서울시립대 교수 물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