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제조업에서 잃어버린 10년
국내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최대 규모 기업 회원사를 둔 경제단체, 대한상공회의소 최태원 회장이 17일 “한국은 제조업에서 10년을 잃었다”고 일갈했다. 그는 재계 서열 2위 SK그룹의 오너 회장이기도 하다.
최 회장은 중국 제조업의 급성장을 거론하며 “인공지능(AI)으로 다시 제조업을 일으키지 못하면 10년 후 거의 다 퇴출당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 상황에 처한 원인으로 “10년 전부터 새로운 산업정책과 전략이 필요하다는 경고를 간과한 전략의 부재”를 꼽았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한국은 13개 주요 제조업종 중 반도체를 제외한 자동차 철강 생활가전 등 12개 업종에서 중국에 밀렸다. 반도체도 2년 안에 뒤집힐 것이란 우려가 제기된다. 호주 전략정책연구소(ASPI) 분석 결과 에너지 AI 로봇 등 핵심기술 64개 중 57개에서 중국이 세계 1위였다. 중국은 2016년 선언한 ‘중국제조 2025’를 통해 기초과학부터 제조업까지 고도화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중국은 이제 없다
세계 최초로 증시 시가총액 4조달러를 달성한 미국 인공지능(AI)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의 젠슨 황 창업자가 “미래 경쟁자는 화웨이”라고 지목했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도 “예전에 미래를 보려고 (미국)실리콘밸리를 찾았다면 이제는 화웨이를 봐야 한다”고 썼다.
화웨이는 더 이상 통신장비와 휴대폰 제조업체가 아니다. 자율주행 시스템에 네트워크 컴퓨팅 클라우드 전기저장장치 사업도 한다. 중국 둥관 화웨이 연구개발(R&D) 캠퍼스에선 여의도 절반 크기(180만㎡) 터에서 3만명의 연구원과 지원 인력 5000명이 일한다.
화웨이의 전체 R&D 인력은 직원의 55%인 11만명이다. 최근 10년간 R&D에 200조원을 투입했다. 화웨이 구성원들은 20대 후반~30대 초반이 대다수일 정도로 젊다. 미국 트럼프 1기 정부부터 본격화한 중국 봉쇄조치를 불과 4~5년 만에 대부분 극복한 힘은 화웨이와 같은 기업들과 구성원들의 열정, 땀에서 나왔다.
더 이상 우리가 알던 중국은 없다. 로봇청소기 시장점유율 1위 기업 로보락에서 보듯 이미 여러 분야에서 중국은 세계를 호령한다. 드론(세계 시장점유율 70%), 전기차(60%), 2차전지(68%), 로봇(40%) 등 미래 성장산업 대부분에서 앞서 달린다.
제조업 부흥을 통한 경제 살리기는 세계적 추세다. 2023~2024년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독일에선 21일 지멘스 폭스바겐 도이체방크 등 61개 기업이 2028년까지 3년간 6310억유로(약 1025조원)를 투자하겠다고 나섰다. 이들은 익숙한 구호 ‘메이드 인 저머니(made in Germany)’ 대신 ‘메이드 포 저머니’(Made for Germany)를 외쳤다. 프랑스가 2018년부터 매해 베르사유궁전에서 개최하는 범정부 차원의 투자유치 행사 ‘프랑스를 선택하세요(Choose France)’를 연상시킨다.
중국에 치이고 받혀 국내 제조업 기반이 무너지면 피해는 미래세대에 돌아간다. 올해 6월까지 제조업 취업자는 12개월째 감소했다. 청년(15~29세) 고용률은 14개월 연속 하락했다. 저출생 여파로 인구가 감소하며 현실화한 ‘축소 경제’는 기술혁신으로 돌파해야 한다.
기업들도 정부에 요구만 하지 말고 더욱 분발해야
이재명정부는 ‘3% 잠재성장률, 세계 3대 AI강국, 5대 경제강국’의 3·3·5 비전을 제시했다. 올해 연간 1.0% 성장도 버거운 판에 3·3·5 비전이 그냥 실현될 리 없다. 초격차 기술을 개발하고, 관련 산업 인프라를 구축하고, 필요한 인재를 육성해야 한다. 과감한 규제혁파와 부처간 칸막이를 넘어선 정책 공조와 융합도 절실하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등 1기 경제팀은 AI 대전환 초혁신경제, 수출 1조달러 달성, 현장에서 해법 찾기 등을 강조했다. 구호에 머물러선 안된다. 이미 ‘잃어버린 10년’에 다시 5년을 더 잃었다간 한국 제조업은 설 땅을 잃을 수 있다.
최태원 회장은 지난해 5월 대한상의 회장 연임 기자간담회에서 구조개혁을 강조하며 물었다. “다들 과거 하던 대로 합니다. 대한민국, 정말 괜찮은 겁니까?” 지금까지 해온 방법들이 효과가 없다면 달리 해야 한다. 정부도 기업도 마찬가지다. 새 정부가 잘해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해야 하겠지만 기업들도 정부에 요구만 하지 말고 더욱 분발해야 한다.
양재찬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