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쇼몽 효과’에 빠진 세계경제
세계화·포퓰리즘·AI 서사 충돌 … 트럼프 불확실성도 가세
같은 자리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사건을 겪더라도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르게 받아들인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입장에 따라 사건을 다르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라쇼몽 효과’다.
‘라쇼몽 효과’는 일본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1950년 개봉영화 ‘라쇼몽’에서 유래된 말이다. 일본의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쓴 두 편의 단편소설 ‘라쇼몽’과 ‘덤불 속’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1951년 베네치아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영화는 일본 헤이안시대(794~1185년) 교토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인적이 뜸한 삼나무 숲 속에서 한 사무라이가 숨진 채로 발견된다. 피의자와 피살자와 목격자는 엇갈린 증언을 한다.
도적은 “사무라이의 아내를 범한 뒤 사무라이와 결투 끝에 그를 죽였다”고 주장한다. 사무라이의 아내는 “도적에게 겁탈 당한 뒤 남편과 동반자살을 시도했지만, 남편은 죽고 저만 살아남았다”고 말한다. 죽은 사무라이는 무당에 빙의해 “도적의 꾀임에 넘어간 아내에게 절망한 나머지 자결을 했다”고 말한다. 제3의 목격자인 나무꾼은 처음부터 사건을 지켜봤지만 사무라이 가슴에 꽂혀 있던 단도를 훔친 사실을 숨기기 위해 “삼나무를 베러 갔다가 덤불 속에서 시체를 발견했다”라고 한다.
네 사람은 저마다 다른 말을 하고 있다.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거짓을 말하고,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과장을 하고, 자신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 사실을 감춘다. ‘라쇼몽’은 세상에 대한 통렬한 풍자다. ‘라쇼몽’은 헤이안 시대뿐 아니라 21세기 세상 곳곳에서 재연되고 있다. 오죽했으면 ‘라쇼몽 효과’라는 말이 보통명사처럼 사용되는 지경에 이르렀을까.
충격적 사건에도 투자자들 낙관하는 이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칼럼니스트이자 CNN 글로벌 경제 분석가인 라나 포루하(Rana Foroohar)는 최근 FT에 ‘라쇼몽 효과에 시달리는 글로벌 경제(The global economy is suffering from the Rashomon effect)’라는 칼럼을 실었다.
포루하는 “현재 세계는 글로벌화와 디지털 기술, 인플레이션, 자본 흐름, 지정학적 균열 등 다양한 서사들이 경쟁 중이다. 그 결과 동일한 경제 지표나 사건들을 놓고도 보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르게 해석되는 ‘라쇼몽 효과’가 발생하고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관찰했다.
“(전세계적으로) 충격적인 정치적 경제적 사건이 발생하고 있지만 금융시장은 그것을 무시하고 흘려보낸다. 팬데믹과 지정학적 분쟁, 글로벌 무역체제의 붕괴, 극우 민족주의와 좌파 포퓰리즘의 확산 등 그 어떤 이슈도 투자자들의 낙관적 기대를 꺾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시장 전문가들은 다양한 설명을 내놓는다. 기업 이익은 여전히 견고하다. 인공지능이 만들어낼 미래 생산성에 대한 기대도 높다. 특정 신흥국 투자에 대한 선호도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포루하는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현재 세계는 ‘공통된 경제 서사(narrative)’를 아직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공통된 서사가 생기기 전까지 세계시장은 불확실성과 정체 상태가 동시에 공존하는 어정쩡한 상황을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전망한다.
포루하의 말대로 역사를 돌아보면 시대별로 강력한 경제 서사가 지배했다. 18세기는 중상주의의 시대였고, 19세기는 자유방임주의가, 20세기 초엔 케인스주의가 서사의 중심이었다. 20세기 후반에는 로널드 레이건 미국대통령과 마거릿 대처 영국총리가 주도하는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휩쓸었다.
각종 서사들이 충돌하는 세계
포루하는 “지금은 우리가 어느 경제체제 안에 있는지도, 다음 체제가 무엇이 될지도 명확하지 않다”면서 “이렇게 많은 잠재적 시장 변동 요인이 동시에 작용하는 상황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고 썼다. 포루하가 관찰한 변동요인들은 어떤 것들이었을까?
첫째, 세계화 서사의 충돌이다. 컨설팅 회사 커니(Kearney)에 따르면 세계 주요 경제국들은 최근 글로벌 통합보다는 자급자족을 강화하는 ‘고립화( islandising )’ 추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미국대통령이 “미국 우선”을 부르짖으면서 보호무역 장벽을 높이고 있다.
그러나 맥킨지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50대 무역 회랑 중 16개는 여전히 강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인도에서 중동에 이르는 신흥 경제권들간 새로운 시장의 통합이 이뤄지고 있다. 세계화가 퇴조하고 있다는 주장과 여전히 세계화는 새로운 형태로 재구성되고 있다는 서사가 충돌하고 있다.
둘째, 대기업과 중소기업 서사의 충돌이다. 대기업들은 코로나 팬데믹을 계기로 공급망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포루하는 여러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과 공급망 전문가들의 의견을 인용해 “대기업들은 효율성 증대를 통해 트럼프 관세로 인한 인플레이션 압력의 80% 이상을 흡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중소기업들의 상황은 다르다. JP모건에 따르면 트럼프 관세는 미국 중소기업들에게 급여 총액의 3%에 해당하는 비용을 안겨줄 것으로 전망된다. 전문가들은 이로 인해 적지 않은 중소기업들이 문을 닫을 수도 있을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셋째, 좌우 포퓰리즘 서사의 충돌이다. 현재 미국에서는 우파와 좌파 양쪽에서 포퓰리즘이 확산 중이다. 공화당의 전통적 지지기반인 이른바 ‘레드 스테이트’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하는 ‘마가(MAGA) 포퓰리즘’이 힘을 얻고 있다. 반면 상대적으로 진보세력이 강한 뉴욕에서는 급진적 개혁성향의 조흐란 맘다니 하원의원을 민주당 뉴욕시장 후보로 선출했다. 요즘 미국에서는 보수 포퓰리즘과 진보 포퓰리즘이 동시에 성장하고 있다. 그만큼 미국의 정치적 미래는 더 큰 불확실성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넷째, 인공지능(AI) 서사의 충돌이다. AI는 과연 생산성의 구원투수인가 아니면 실업의 가속장치인가. 어떤 이들은 AI가 기업의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려 수익과 주가를 장기간 높은 수준으로 유지시킬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다른 쪽에서는 AI가 일자리를 뺏고 그로 인한 사회·정치적 불안을 불러올 것이라고 우려한다. 어떤 국가와 기업이 AI 경쟁에서 승리할 것인가, AI 운용에 필요한 막대한 에너지와 물은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
어떤 서사가 옳을까? 서로 다른 서사가 충돌하는 ‘라쇼몽 효과’ 속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올바른 서사를 정립해야 한다. 한 번 방향을 잡기 시작한 서사는 무섭게 번진다.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고, 사람들의 욕구를 깊이 들여다보고, 사회의 갈등을 균형 있게 파악하면서 다수가 동의하는 서사를 만들어 나가야 하는 이유다.
쉽지 않은 과제다. 무엇보다도 트럼프 대통령의 오락가락 통상외교정책이 세계경제의 ‘라쇼몽 효과’를 한층 심화시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돌발적 관세 부과와 협상 번복뿐 아니라 내정간섭까지 하면서 세계경제의 불확실성을 가중시키고 있다.
트럼프는 한국에게 어떤 곤봉을 들이댈까
FT는 9일(현지시간) ‘관세를 외교 협박 무기로 만든 트럼프(How Trump has turned tariffs into diplomatic shakedowns)’라는 기사를 실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경제적 목표뿐 아니라 지정학적·외교적 이익을 달성하기 위해 관세를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브라질에 50%의 징벌적 관세를 부과했다. 브라질 사법당국이 쿠데타 모의 혐의로 기소된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을 기소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인도의 관세율은 25%에서 50%로 인상했다. 인도가 러시아산 에너지와 무기를 구매한다는 이유였다. 캐나다는 팔레스타인 국가 승인 방침을 내세운 데 대한 보복성 조치로 35%의 관세를 맞았다.
조 바이든 전 행정부에서 재무부 부차관보를 지낸 킴벌리 클라우징 UCLA 로스쿨 교수는 FT와의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상대방을 길들이는 과정에서 “관세가 주된 곤봉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제 얼마 후면 이재명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에게 또 어떤 ‘곤봉’을 들이댈까. 한미간에는 어떤 ‘라쇼몽 효과’가 돌출될 것인가. 일찌감치 주한미군의 역할과 방위비 분담 등을 둘러싸고 부담스런 이야기들이 태평양을 건너오고 있다. 이 대통령의 평소 지론대로 “객관적인 판단과 객관적인 데이터, 객관적인 사실” 놓고 토론을 하면 양국간 ‘라쇼몽 효과’를 극복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