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안와르 말레이 총리 리더십과 아세안의 도약
창의적 의장국 외교로 아세안의 중심성 강화 … 아세안 공동체 비전 2045와 동티모르 가입
안와르 총리는 10월 정상회의에 중국·러시아·브라질·남아공 정상들도 초청했다.
만약 미·중·러 지도자들이 모두 참석한다면 아세안으로서는 매우 중요한 외교적 승리가 된다. 이는 영향력 있는 국제회의를 주도할 역량을 과시해 아세안의 위상을 한단계 높이는 동시에, 안와르 총리의 중재자 위상을 크게 높여줄 것이다. 또한 브릭스 5개국 정상들을 아세안 외교 무대의 한자리에 모음으로써 아세안-브릭스 관계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릴 계기가 될 수 있다.
말레이시아의 2025년 아세안 의장국 활동이 기대 이상으로 순항하고 있다. 안와르 이브라힘 총리의 의장직 수행은 창의적 아이디어로 기대를 고양시키며 아세안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20년 전인 2005년 의장국 수임 때 동아시아(EAS) 정상회의를 출범시켰고, 10년 전인 2015년 의장국 수임 때 아세안 공동체를 발족시킴으로써 아세안 발전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2025년 다시 찾아온 의장국 수임은 역사적 기회다. 미국과의 관세전쟁과 미·중 전략경쟁 등으로 인한 지정학적·지경학적 불확실성 속에서 아세안호를 이끌어야 하는 막중한 과제를 안고 있다. 아세안의 단결과 단합을 유지하면서 아세안을 세계 경제성장의 엔진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그래야 세계가 진화하는 아세안의 정치·안보·경제 구도 속으로 계속 끌어들일 수 있고, 아세안 중심성에 대한 지지도 확보할 수 있다.
안와르 총리는 아세안의 목소리를 대변하면서 미국과의 관계에 활력을 불어넣는 데 주력하고 있다. 특히 개별 회원국의 대미 관세 협상과 관련해 아세안 전체의 단합된 목소리가 차지할 공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인식하에 지난 5월 아세안 정상회의에서 회원국의 대미 양자 협상과 병행해 미국의 관세에 대응할 아세안 전담팀 구성을 발표했다.
8월 7일부터 적용된 트럼프 대통령의 새로운 상호 관세율 하에서 아세안 회원국들의 성적은 비교적 양호했다. 아세안 주요 경제들이 상호 관세 19~20% 범위에서 미국과 협상을 타결하며 선방한 셈이다.
한편 안와르 총리는 지난달 31일 의회 연설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오는 10월 제47차 아세안 정상회의 참석을 확정했다”고 밝혔다. 미국 대통령의 참석 여부는 언제나 의장국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다. 미국 대통령의 참석은 전 세계의 이목을 아세안과 주최국으로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정상회의 흥행 여부를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이기도 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1기였던 2017년에 단 한 차례 아세안 관련 정상회의에 참석한 바 있어, 그간 ‘아세안 홀대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안와르 총리는 미국 이외에도 중국, 러시아, 브라질, 남아공 대통령을 초청했다. 또한 의장으로서 태국과 캄보디아 간 국경 무력 충돌을 성공적으로 중재해 휴전을 끌어내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도 받았다. 이 같은 외교적 중재는 세계의 이목이 쏠린 가운데 의장국 수도에서 이루어졌으며, 아세안의 위상 제고뿐 아니라 의장의 외교적 무게감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아세안-중국-GCC 3자 협의체 출범
안와르 총리의 민첩한 외교 행보와 노련한 수완은 2021년 2월 이후 아세안을 옥죄어 온 미얀마 위기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트럼프 대통령 또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국제적 평가를 받았다. 그는 태국·캄보디아 정상과 각각 통화해 신속히 휴전에 합의할 것을 촉구하며, 자신의 중재를 거부하면 진행 중인 무역 협상을 중단하겠다는 압박까지 가했다. 이제 트럼프 대통령은 태국·캄보디아 국경 분쟁뿐 아니라 전 세계 분쟁 지역에서 ‘화해와 평화의 사도’ 이미지를 확산해 가고 있다. 이와 관련해 8월 3일 캄보디아 순짠돌 부총리는 트럼프 대통령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하겠다고 언급했다.
지난 5월 정상회의에서 아세안은 20년이라는 먼 장래를 내다보는 ‘아세안 공동체 비전 2045’를 채택했다. 이는 세계와 함께 긴 호흡으로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비전 2045는 혁신적이고 포용적이며 복원력이 있고 사람 중심의 공동체를 지향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비전 2045는 기존 아세안 공동체의 3개 기둥(정치·안보 공동체, 경제 공동체, 사회·문화 공동체)에 ‘연계성 공동체’라는 추가 기둥을 포함했다. 전체 공동체 구축 노력에서 연계성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한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둘째, 동티모르의 아세안 정회원국 가입이 확정됐다. 1999년 캄보디아 이후 10개국 체제를 유지해온 아세안은 이번 10월 정상회의에서 옵저버로 참여해 온 동티모르를 정식 회원국으로 받아들여 11개국 체제로 확대될 예정이다.
셋째, 아세안-중국-GCC 3자 협의체의 출범이다. 통상 상반기 정상회의는 아세안 자체 회의로 한정됐지만, 안와르 총리의 이니셔티브로 외연을 확대했다. 이는 트럼프발 관세 전쟁이라는 지정학적·지경학적 격변기를 헤쳐 나가기 위한 지혜의 한 단면으로 평가된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미국의 상호 관세가 이달 7일 발효됐다. 이로써 1947년 출범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체제와 1995년 이를 계승한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의 자유무역 질서는 유명무실해졌고 사실상 역사적 종언을 고했다.
관세전쟁 속 외교 무대의 주도권 확보
1967년 출범한 아세안은 자유무역을 신봉하며 최대 수혜자로 부상했고, 이를 통해 경이적인 경제 발전을 이루며 세계경제의 지속적 성장을 견인해 왔다. 그만큼 아세안은 지난 4월 2일 트럼프 대통령의 ‘해방의 날’ 선포 이후 개별 회원국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명운을 걸고 대미 협상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는 단순한 관세율 조정이 아니라 향후 글로벌 공급망과 기술 패권 경쟁에도 영향을 미칠 중대한 사안이었다.
미국과 협상 결과 아세안 주요 경제들은 최상위 성적은 아니지만 차상위 수준의 결과를 거뒀다는 평가다. 이는 공급망 다변화의 대안으로 동남아에 대한 투자 신뢰를 높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높은 관세율이 비용 부담을 낳지만 동시에 미국 공급망 재조정에서 동남아의 전략적 역할을 재확인시켜 준 것이다. 업계도 조심스럽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번 협상 결과가 수출 경쟁력 유지에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아세안 10개국의 최종 성적표는 다음과 같다. 싱가포르 10%,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태국·필리핀·캄보디아 19%, 베트남 20%, 브루나이 25%, 라오스와 미얀마는 40%로 결정됐다. 미국은 아세안 국가 중 전략적 유연성을 가진 일부 국가에는 압력을 완화한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의 오는 10월 아세안 정상회의 참석은 미국이 여전히 동남아 지역에 관심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관세 긴장 이후 미국이 아세안 파트너들을 안심시키려는 강력한 신호가 될 것이다. 다만 이번 참석이 단순히 아세안-미국 관계 개선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동남아에서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려는 것인지는 지켜볼 필요가 있다. 이 방문이 실질적 정책 전환으로 이어질지, 아니면 외교적 ‘보여주기’로 그칠지는 향후 관찰이 필요하다.
안와르 총리는 10월 정상회의에 중국·러시아·브라질·남아공 정상들도 초청했다. 만약 미·중·러 지도자들이 모두 참석한다면 아세안으로서는 매우 중요한 외교적 승리가 된다. 이는 영향력 있는 국제회의를 주도할 역량을 과시해 아세안의 위상을 한단계 높이는 동시에, 안와르 총리의 중재자 위상을 크게 높여줄 것이다. 또한 브릭스 5개국 정상들을 아세안 외교 무대의 한자리에 모음으로써 아세안-브릭스 관계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릴 계기가 될 수 있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가 지금껏 금과옥조로 믿어 온 자유무역 질서는 유명무실해졌다. 변화무쌍한 지경학적 구도 속에서 새로운 생존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 무역·투자의 다변화를 야심차게 추진해야 하며, 아세안 및 글로벌 사우스 신흥 경제들과 더욱 긴밀히 손잡아야 한다.
한-베트남 협력 모델 확장 필요
최근 아세안의 중요성은 우리에게도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7월 수출에서 아세안 지역은 미국을 제치고 한국의 2위 수출 시장이 되었고, 수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10.1% 증가한 109억1000만 달러를 기록했다. 반도체 수출은 역대 7월 가운데 최대 실적을 달성했다. 또한 지난주 또 럼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의 국빈 방한을 계기로 한·베트남 협력의 청사진이 주목받았다. 올해는 양국 FTA 체결 10주년이다. 양국은 2030년까지 교역 규모를 1500억달러로 확대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현재의 거의 두 배 수준이다. 또 방산·조선을 비롯해 원전, 치안, 고속철도, 신도시 개발 등 대규모 인프라 협력도 가속화하기로 했다.
한국은 글로벌 공급망 격변기에 아세안 경제의 역동성에 주목해야 한다. 한·베트남 협력 모델을 아세안의 다른 신흥 경제에도 접목할 수 있는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해야 한다.
전 태국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