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섬백길 걷기여행 29 소안도 대봉산 둘레길
항일의 섬에서 만나는 풍성한 보양음식
면 단위 작은 섬에서 건국훈장 수상자 20명에 공인 독립운동가만 89명이 배출됐다. 이 놀라운 섬은 완도군 소안도다. 소안도에는 백섬백길 29코스인 대봉산 둘레길이 있다. 소안도항에서 출발해 북쪽 해안가 마을인 북암리에 이르는 7.5㎞의 트레일이다. 특히 숲길 구간은 전통 방식으로 옛길을 정비해 자연스럽고 옛스럽다.
일제강점기 소안도는 함경도 북청, 부산 동래와 함께 국내 항일 독립운동 3대 근거지 중 하나로 꼽혔다. 소안도 항일 독립운동의 뿌리는 갑오년(1894년) 동학혁명에 젖줄을 대고 있다.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동학 접주 나성대 장군이 동학군을 이끌고 소안도로 들어와 군사훈련을 시켰는데 이때 소안도 출신 이준화, 이순보, 이강락 등이 동학군에 합류했고 소안도 주민들은 동학군 식량을 조달했다. 혁명 실패 후 이준화 등은 의병을 조직해 소안도 인근 당사도의 일본인 간수들을 처단했다.
소안도 주민들은 1905년부터 왕실 소속 궁납전(宮納田)이던 소안도 토지를 강탈해 사유화한 사도세자의 5세손이자 친일 매국노인 이기용 자작으로부터 토지를 되찾기 위해 법정 투쟁을 했다. 13년 동안 이어간 투쟁 끝에 토지를 되찾은 소안도 사람들은 성금을 모아 사립소안학교를 세웠는데 이 학교가 독립운동가 배출의 저수지였다.
소안학교는 해남, 제주도에서까지 유학생이 몰려올 정도로 대단했다. 1924년, 2차 소안노농대성회 사건을 필두로 수많은 소안도 사람들이 일제 경찰에 체포돼 감옥살이를 했다. 1920~1930년, 소안도 관련 신문 기사만 200건이 넘고 등장인물은 수백 명에 달했다. 감옥에 가는 주민들이 생기면 소안도에 남은 사람들도 감옥 간 주민과 고통을 함께하기 위해 한겨울에도 불을 때지 않고 지냈다 하니 참으로 의리가 깊은 섬이었다.
소안도에는 감옥 간 사람들이 많다보니 옥살이를 하고 나온 이들을 위한 보양식도 발달했다. 독립운동가들이 출옥 해 소안도로 돌아오면 어혈을 풀어주고 구타와 고문을 당한 장독을 빼주고 또 몸보신을 시켜주기 위해 다양한 민간 처방들이 행해졌다.
생지황으로 막걸리를 담아 먹이면 어혈이 풀렸다. 개머루 뿌리를 찧어서 고문으로 멍든 데 붙이면 푸른 물이 겉으로 다 빠져나왔다. 잎이 지네 모양으로 생긴 지네초란 약초도 약효가 뛰어났다. 순사들에게 매 맞은 상처에 지네초를 다려 먹이거나 생으로 짜서 먹여도 효과가 금방 나타났다. 부러진 뼈도 금방 붙을 정도였다.
기력 회복을 위해서는 보신탕이나 개소주를 먹이는 것은 기본이고 해산물로도 다양한 보양식을 만들어 먹였다. 대물 붕장어와 맥문동, 삽추(창출), 한갈쿠, 우슬 등 한약재 달인 물을 넣고 죽을 끓여서 먹였다.
전복도 옥살이로 축이 난 몸을 회복시키는데 큰 보약이었다. 전복은 다려서 먹였다. 지금처럼 전복이 흔하지 않을 때 전복은 금덩어리였다. 귀하디 귀한 자연산 전복을 옹기그릇에 넣고 물과 찹쌀을 넣은 뒤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옹기를 진흙에 파묻은 뒤 그 위에다 불을 땠다. 그렇게 푹 고아낸 전북을 먹으면 몸의 회복이 빨랐다.
복쟁이(복어) 요리도 옥살이 한 이들의 보양식으로 좋은 음식이었다. 독을 잘 제거한 복어에 찹쌀을 넣고 끓인 복어 곰국은 기력 회복에 그만이었다. 잘 말려둔 참복찜도 입맛을 회복 시켜주는데 특효였다. 잘 마른 복어 사이에 된장, 고추장, 깨소금을 넣은 양념을 바른 뒤 갈라진 배를 덮고 몸통을 볏짚으로 묶은 뒤 떡 시루에 넣고 떡을 쪄내듯이 쪘다. 2시간 남짓 불을 때면 알맞게 잘 익었다. 잘 쪄낸 복어 위에 참기름을 발라서 밥상에 올렸다. 지금은 거의 잊혀진 섬의 토속 음식들을 다시 복원해 낸다면 우리의 식탁이 얼마나 풍성하고 의미 깊어지겠는가.
백섬백길: https://100seom.com
공동기획: 섬연구소·내일신문
강제윤 사단법인 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