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에너지
규제와 진흥은 함께 갈 수 없다는 미신
1973년 1차 오일쇼크 때 미국에서의 일이다. 기름값이 천정부지로 뛰고 공급도 불안정해졌다. 그 시절 자동차들은 ‘머슬카’라 불릴 만큼 덩치가 크고 기름도 많이 먹었다. 1975년 제럴드 포드 행정부가 대응책으로 꺼내든 것은 연비규제였다. 자동차 배출기준과 평균연비를 설정해 강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연비 기준이 점점 높아지자 자동차 제작사들은 과감한 기술혁신에 나섰다. 알루미늄 복합소재를 사용해 차체를 경량화하고 엔진 배기량도 대폭 줄였다.
하이브리드 차와 전기차 개발에도 속도가 붙었다. 몇몇 제작사는 전기차 몇 대만 판매해도 평균 연비가 확 좋아져 벌금을 피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한때 ‘전기차는 규제 회피용 비밀병기’라는 말이 돌기도 했다. 연비규제 기준이 내연기관으로는 사실상 달성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강화되면서 거의 모든 제조사가 전기차 라인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연비규제가 결과적으로 전기차 시대의 문을 여는 가속 버튼이 된 셈이다.
규제는 단순히 기업활동을 제약하는 올가미가 아니다. ‘포터 가설’이 말하듯, 합리적인 규제는 기업의 혁신을 자극하고 경쟁력 강화를 촉진한다. 시장질서를 재편함으로써 신기술의 진입 가능성을 열고 적절한 진흥정책과 맞물릴 경우 새로운 기회의 창을 제공한다. ‘규제는 늘 옳다’는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니다. 사실 과도하고 불필요한 규제도 많다. 지나치게 엄격하거나 비효율적인 규제는 기업의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활동을 제한한다. 모든 정부가 규제 혁파에 역점을 두는 이유다.
환경부가 에너지 업무 맡으면 곤란해질까
하지만 규제의 부재가 초래할 심각한 결과도 간과할 수 없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금융시장의 과도한 자율성과 규제완화가 원인이었다. 파생상품 거래 투명성과 자본건전성 규제가 사실상 전무해 고위험 상품이 금융권 전반에 퍼지고 부실이 폭발하면서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에너지 분야도 마찬가지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원전사고, 딥워터 호라이즌 원유 유출사고 등은 모두 안전규제와 대응시스템 소홀이 빚은 끔찍한 참사였다.
최근 규제부처인 환경부가 진흥이 필요한 에너지 업무를 맡으면 곤란하다는 주장이 횡행하고 있다. 기후에너지 분야 정부 조직개편안을 두고서다. 근거는 단순하다. 규제에 익숙한 환경부가 에너지 정책을 주도하면 산업 효율성과 기업 경쟁력이 떨어질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환경부가 미덥지 않다는 주장이라면 이해할 수도 있다. 환경부는 기후변화 대응을 총괄하는 주무부처다. 온실가스 감축과 기후변화 적응이 미흡할 경우 그 책임은 환경부가 질 수밖에 없다. 힘이 약해 경제부처들의 벽을 넘지 못했다는 항변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구차한 변명으로만 비쳐질 뿐이다. 물 관리 일원화로 권한이 커졌음에도 과거 국토부가 주도했던 댐 건설과 준설 위주의 물 관리 방식을 그대로 유지해 왔다는 지적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환경부는 규제부처이고 그 외 부처들은 진흥부처라는 흑백논리는 곤란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규제만 하거나 진흥만 하는 부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규제에는 늘 진흥이 붙고 진흥에는 규제가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예컨대 환경부 소관인 대기오염물질 총량제는 대표적인 규제다. 사업장별로 배출총량을 제한하고, 초과 시 과징금을 부과한다. 그런데 이 제도는 대기질 개선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 진흥책도 함께 쓴다. 오염물질을 걸러내는 환경설비를 설치하는 기업에 보조금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산업부에도 많은 규제가 있다. 재생에너지의무화제도(RPS)와 에너지 가격규제가 대표적이다. 전자는 일정 규모 이상 발전사업자에게 재생에너지 발전 비율을 채우도록 강제한다. 재생에너지 보급 확대라는 진흥 효과를 위해서다. 후자는 석유 가스 전기 등의 가격을 직접 통제하거나 가격 인상에 상한선을 두기 때문에 가장 강력한 규제로 꼽힌다. 가격규제도 결국은 진흥수단으로 볼 수 있다. 에너지 소비자의 부담을 줄여 에너지 이용의 안정성을 확보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규제와 진흥, 같은 목표 지원하는 두 축
규제와 진흥이 함께 갈 수 없다는 것은 해괴한 논리다. 어찌 보면 미신에 가깝다. 규제와 진흥은 서로 반대방향으로 작용하는 힘이라는 전제부터가 틀렸다. 규제는 안전벨트와 같다. 더 안전하고 빠르게 달리기 위한 장치다. 브레이크처럼 속도를 줄이려고 만든 게 아니다.
연비규제와 전기차의 예상치 못한 연결고리는 규제야말로 산업 발전의 견인차임을 보여주는 많은 사례의 하나에 불과하다. 규제와 진흥은 같은 목표를 다른 경로로 지원하는 두 개의 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