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진의 미국 톺아보기
미국 반도체 산업, 부활의 지름길일까 착시일까
지난 22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미국 정부가 인텔 지분 10%를 인수하는 계약을 공식 발표했다. 글로벌 경쟁력 약화로 위기를 맞은 인텔을 지원하는 동시에 국가 안보와 기술 자립을 확보하기 위해 정부가 반도체 산업에 직접 개입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드러낸 조치로 평가된다. 이번 결정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파산 위기에 몰렸던 크라이슬러(Chrysler)와 제너럴모터스(GM)에 대해 미국 정부가 대규모 구제금융을 투입한 사례 이후 가장 큰 규모로 이뤄진 ‘사실상의 국유화’로 손꼽힌다.
그러나 이번 인텔 사례는 성격 면에서 과거와는 확연히 다르다. 크라이슬러와 GM의 경우 당시 정부는 일시적이고 한정적인 개입을 통해 위기 극복을 지원했고, 이후 구조조정과 민영화 과정을 거쳐 투입 자금을 회수하는 방식으로 정리했다.
반면 이번 인텔 지분 인수는 단순히 위기 극복에 머무르지 않고, 산업 경쟁력 강화를 국가 전략의 핵심 과제로 삼아 특정 산업을 직접 육성·지원하겠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 즉 트럼프행정부가 전통적인 구제금융을 넘어선 국가자본주의적 접근을 노골적으로 표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상 국유화된 인텔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이번 트럼프행정부의 결정을 “미국의 국산 반도체 제조에 대한 환상”이라고 비판했다. 20세기 후반 실리콘밸리를 상징하며 개인용 컴퓨터 시대를 연 주역이었던 인텔은 한때 미국의 자존심으로 불렸지만, 현재 시가총액은 1000억달러 수준에 불과해 글로벌 반도체 기업 순위 15위에도 들지 못한다.
바이든행정부 시절에도 2022년 반도체 지원법(CHIPS Act)을 통해 80억달러 보증, 최대 120억달러 대출 등 총 200억달려의 지원이 이뤄졌지만 이는 사실상 국가 차원의 구제금융에 불과했다. 오하이오주에 건설 중이던 초대형 반도체 공장은 당초 올해 가동 예정이었으나 공정 지연으로 가동 시점이 2030년대 초반으로 늦춰졌고, 인텔의 기술력은 여전히 TSMC에 뒤처져 있다. 매출은 정체되고 현금흐름은 악화되는 반면 부채 비율은 크게 치솟고 있다.
인텔은 보조금이 없었다면 이미 시장에서 퇴출되었을 기업이라는 냉정한 평가마저 나온다. 따라서 인텔의 생존이 곧 미국 반도체 산업의 건전성을 담보하지는 못한다는 지적은 설득력을 얻을 만하다.
문제의 본질은 반도체가 단순 제조업이 아니라는 데 있다. 첨단 반도체 생산에는 네덜란드 ASML이 독점하는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 일본 기업이 공급하는 고순도 포토레지스트와 불화수소 등 핵심 소재, 대만과 한국이 확보한 숙련된 생산 인력과 파운드리 경험, 미국의 설계 역량과 소프트웨어 생태계라는 네 가지 요소가 유기적으로 결합해야 한다. 그럼에도 미국은 이 같은 글로벌 분업 구조 속에서 자국 내 생산만으로 공급망을 자급자족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어 그 자체로 비현실적이다. 실제로 TSMC 애리조나 공장의 생산 단가는 대만 본토보다 20% 이상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국내 생산망 갖추려는 미국의 의도
경제사에는 국가가 특정 산업을 지키기 위해 보조금이나 보호무역 장벽을 동원했지만, 결과적으로 기업 경쟁력을 갉아먹고 혁신 동력을 잃게 만든 사례가 적지 않다.
대표적인 예가 영국의 자동차 산업이다. 1970~80년대 영국 정부는 로버(Rover), 브리티시 레이랜드(British Leyland) 등 자국 자동차 기업들을 보호하기 위해 대규모 국유화와 보조금을 투입했지만, 경영 혁신은 지연되고 노사 갈등은 심화되었다. 값싼 보호막 속에서 기업들은 품질 경쟁력을 상실했고, 결국 영국 자동차 산업은 글로벌 무대에서 거의 몰락하다시피 했다.
일본의 버블 붕괴 이후 조선·철강 산업도 유사한 궤적을 보였다. 정부는 고용 유지를 명분으로 보조금을 쏟아부었지만, 세계 수요 변화와 기술 혁신에 적응하지 못한 기업들은 만성적 적자 구조에 빠졌다. 정부 지원금이 생존 가치가 없는 기업의 퇴출을 지연시켜, 생산요소가 비효율적 기업에 묶이는 이른바 ‘좀비기업(zombie firm)’ 이론 역시 정부 보조금에 중독된 기업들이 즐비하면 기업은 물론 산업, 더 나아가 경제 자체가 무너질 수 있음을 경고한다.
극단적 보호무역주의와 관련해서도 데이비드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은 각국이 잘할 수 있는 분야에 특화할 때에만 전체 후생이 개선된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과거 선례에 비추어 이는 WTO 규범 등 국제무역질서와도 충돌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실제로 미 연방항소법원은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상호관세 부과 행정명령을 권한 남용으로 무효화해 통제받지 않고 대통령 독자적으로 이루어진 극단적 보호무역주의는 법질서와 충돌할 수 있는 것임을 판단한 바 있다.
그럼에도 미국은 보호무역주의와 보조금을 통한 미국 경제의 자급자족을 고집하고 있어, 미국 경제는 단기적으로 일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생산성을 갉아먹고 소비자 후생을 악화시킬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반도체, 군사·안보와 직결된 전략 물자
여기에 지정학적 변수도 무시할 수 없다. 반도체는 단순한 산업재가 아니라 군사·안보와 직결된 전략 물자다. 미국이 ‘기술 패권’을 내세워 반도체를 정치화한다면 중국은 물론 동맹국들조차 불편해질 수 있다.
한국과 대만, 일본은 미국의 요구에 따라 중국과의 반도체 거래를 제한하고 있지만, 이들 기업 역시 글로벌 매출의 상당 부분을 중국 시장에서 거둔다. 미국이 지나친 보호주의로 나아갈 경우, 동맹의 협력도 균열을 맞이할 수 있다. 미국의 선택은 단순히 국내 산업 문제를 넘어, 동맹 관리와 국제 무역질서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미국 반도체 산업의 부활을 위해서는 어떠한 전략을 취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우선은 동맹과의 협력 강화가 필요하다. TSMC, 삼성, 라피더스 같은 기업의 성장은 미국이 주도하는 반도체 글로벌 공급망의 경쟁력 강화, 그리고 미국 안보와도 직결된다. 미국은 이들의 투자를 환영하고, 인재와 장비의 이동을 원활히 하여 글로벌 공급망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한다. 지금과 같이 관세장벽을 피하기 위한 미국 현지 투자는 충분한 인프라가 구축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반도체 생산이어서 자칫 단가만 높일 수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구조개혁과 인재 양성이 필요하다.
미국 반도체 산업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인력 집약적이면서도 고도로 숙련된 엔지니어가 부족하다는 것인데, 만약 미국이 반도체 생산의 중심에 서고자 한다면, 엔지니어 교육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로 장기적 관점에서 연구개발(R&D) 생태계를 강화하고, 핵심 장비와 소재의 수입을 개방하는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
끝으로, 반도체 산업은 수십년 단위의 장기 산업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을 뒤집는다면 기업들은 불확실성 속에서 투자와 혁신을 주저할 수밖에 없다. 당장 이전 정부에서는 보조금으로 이번 정부에서는 지분 인수를 통해 인텔의 경영에 영향을 미친다면 기업 역시 정부의 입만 쳐다보게 되어 자생력을 갖기 어렵다.
인텔 국유화, 위험한 착시일 수도
인텔의 위기는 단순한 기업의 실패가 아니다. 그것은 보호주의와 자급 환상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경고음이다. 미국의 길은 폐쇄가 아니라 협력과 혁신이어야 한다. 반도체는 본질적으로 세계화의 산물이며, 글로벌 분업과 협력이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산업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지속적으로 미국산 반도체에 대한 환상에 매달린다면 기술 패권은 더욱 빠르게 아시아, 특히 미국이 우려하는 바와 같이 중국으로 이동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트럼프정부의 인텔 국유화는 미국의 반도체 산업을 살리려는 고육지책이지만, 동시에 위험한 착시일 수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