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가지 딜레마’에 빠진 세계경제
세계화·민주주의·민족주권 세마리 토끼 못 잡아 … WTO 위기 극복이 관건
미국의 요청으로 미국 땅에 우리 돈 9조원이나 들여가며 공장을 짓고 있던 우리 근로자 300여명이 불법 체류 혐의로 체포됐다. 미 국토안보수사국(HSI)과 이민세관단속국(ICE), 마약단속국(DEA), 조지아주 순찰대가 군사작전 벌이듯 조지아주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현장에 들이닥쳤다.
미국민들이 저런 일을 당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알렉스 타바록 조지메이슨대학 경제학과 교수는 “만일 한국이 미국인 수백명을 쇠사슬로 묶었으면 미국인들은 지금 전쟁을 이야기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내 생각에는 그들은 불법 체류자였고 이민세관단속국은 자기 할 일을 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한국과 정말 좋은 관계”라면서 “미국 내에 관련 기술을 아는 사람이 부족하다면 외국의 전문가들이 들어와 미국인들을 교육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미국의 이율배반이다. 한국으로부터 투자와 기술은 얻고 싶지만 그 과정에서 필요한 노동력은 받고 싶지 않은 것이다.
한국의 딜레마는 깊다. 세계 최강국이자 우방인 미국의 압력에 맞설 힘은 없고, 세계 최대 시장을 포기할 수도 없다.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미국 땅에 공장을 지어주면서도 그 현장 근로자들이 불법체류자로 몰리는 수모를 당하고 있다.
“세계경제 트릴레마에 발목 잡혔다”
미국이나 한국 모두 ‘세계화의 역설’에 직면했다. 미국의 현대차-LG 공장 건설 현장의 한국 근로자 체포 사건은 세계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이해충돌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의 석좌교수인 대니 로드릭은 일찌감치 이런 현상을 다음의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로드릭 교수는 저서 ‘자본주의 새판짜기(The Globalization Paradox)’에서 “우리는 하이퍼 글로벌라이제이션, 민주주의, 민족자결권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없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이퍼 글로벌라이제이션과 민주주의를 잡으려면 민족국가를 포기해야 한다. 민족국가를 유지하면서 하이퍼 글로벌라이제이션을 추구하려면 민주주의를 잊어야 한다. 민족국가에 민주주의를 결합하고 싶다면 깊은 세계화에 이별을 고해야 한다.”
세계화 과정의 충돌은 예견된 일이었다. 나라마다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세계무역기구(WTO)였다. WTO는 1995년 1월 1일 자유무역과 다자주의를 표방하면서 출범했다. WTO는 선언문에서 “보호무역주의에 대한 저항 의지를 표명하며 우루과이라운드(UR)를 통해 이룬 무역자유화와 규범 강화가 점진적으로 더 개방적인 세계 무역 환경을 조성할 것”이라고 밝혔다.
WTO 출범 이후 세계무역은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렸다. WTO에 따르면 2024년 세계무역 규모는 1995년 대비 442% 급증했다. WTO는 회원국 간의 무역갈등을 해결하는 경찰과 판사 역할도 수행해 왔다. 대표적인 사례로 한국은 WTO를 통해 일본 후쿠시마 수산물에 대한 수입금지의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WTO 체제는 그러나 ‘트럼프발(發) 보호주의 광풍’에 위기를 맞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4월 2일을 ‘해방의 날’로 선언하면서 주요 교역 58국에 대한 상호관세율을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으로 무관세 적용을 받던 한국에는 기본관세 10%에 국가별 관세 15%가 더해진 25%의 상호관세율을 안겼다. 한국은 지난 7월 30일 3500억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와 1000억달러 상당의 미국산 에너지 구매를 조건으로 상호관세율을 25%에서 15%로 낮출 수 있었다.
한국의 최대 수출 품목인 자동차에 대한 관세는 여전히 25% 적용을 받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브라질과 인도에는 각각 50%의 관세폭탄을 안겼다. 중국 제품에 대한 관세는 145%까지 올렸다가 지금은 30%를 적용 중이다. 이 정도라면 WTO 체제의 붕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차별 없는 무역과 언제나 접근 가능한 시장과 공정한 경쟁이라는 WTO의 정신은 헌신짝처럼 버려지고 있다.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WTO 사무총장은 WTO 체제는 여전히 건재하다고 주장한다. 오콘조-이웨알라 사무총장은 지난 4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에 ‘글로벌 무역에 대한 스트레스 테스트(A stress test for global trade)’라는 칼럼을 기고했다.
그는 이를 통해 “WTO의 핵심은 여전히 안정적”이라면서 “회원국들은 최근의 위기를 개혁을 밀어 붙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라고 썼다. 그는 먼저 WTO가 처한 위기를 인정한다. “지난 6개월 동안 글로벌 무역은 미국의 일방적 조치로 충격을 받았다. WTO의 종말을 선언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다자무역체제의 종말을 전하는 ‘부음’은 1980년대부터 등장해 왔지만 지금 벌어지는 혼란은 속도와 범위에서 전례가 없다. 개방적이고 예측가능한 무역에 대한 신뢰가 부인할 수 없을 만큼 흔들리고 있다.”
트럼프 보호무역주의에 WTO 위기
WTO 사무국에 따르면 올해 전세계 상품교역은 0.9% 증가에 그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트럼프 발 관세파동 이전에 제시된 2.7% 전망치에는 크게 못 미치지는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무역은 예상보다는 정상적인 조건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WTO 분석에 의하면 전세계 상품무역의 약 72%는 여전히 기본적인 ‘최혜국대우(MFN)’ 조건에서 이뤄지고 있다. 이는 연초 80%에서 하락한 것으로 더 떨어질 수도 있다.
오콘조-이웨알라 사무총장은 그러나 세계 무역시스템은 회복탄력성을 보이고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글로벌 무역 시스템은 불안정한 균형을 보이고 있지만 그 핵(core)은 여전히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 문제는 그 핵의 안정을 어떻게 지켜 나가느냐이다.”
WTO 핵의 안정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 오콘조-이웨알라 사무총장은 WTO 규범의 현대화를 제안한다. WTO 규범은 대부분 1990년대 초반 만들어진 낡은 것들이다. 오콘조-이웨알라 사무총장은 전원합의를 중시하는 기존의 의사결정 방식이 자칫 “마비의 처방전(a recipe for paralysis)”으로 작용할 수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가지 방법은 복수의 국가들간 협정을 더 쉽게 만드는 것이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회원국은 나중에 가입해도 되고, 가입하지 않아도 된다. 이는 WTO가 인공지능(AI)처럼 (빠른) 변화에 더 기민하게 대응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WTO 규범 현대화 필요”
오콘조-이웨알라 사무총장은 WTO 개혁의 동력이 축적되고 있다고 말한다. 싱가포르와 스위스 우루과이 호주 아랍에미리트(UAE) 뉴질랜드 영국 같은 중견국들이 글로벌 무역 시스템의 현대화를 위해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제네바 주재 대사들 사이에서는 개혁 과제와 이행 수단을 식별하기 위한 작업이 진행 중”이라고 전했다.
신흥경제국 모임인 브릭스(BRICS)도 WTO체제를 지지하는 동력이다. 특히 미국의 보호주의에 맞선 중국은 자유무역과 다자주의의 수호자를 자임하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8일 화상으로 진행된 브릭스 정상회의에서 “WTO를 중심으로 한 다자간 무역체제를 유지하고, 모든 형태의 보호주의에 저항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시 주석은 “경제 세계화는 막을 수 없는 역사적 흐름”이라며 “각국의 발전은 개방과 협력의 국제환경과 떼려야 뗄 수 없으며, 누구도 자기폐쇄의 외딴 섬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했다.
과연 WTO는 중견국들과 신흥경제국 브릭스의 지지만으로 개혁동력을 살릴 수 있을까? 경제와 정치와 군사 모두 세계 최강국인 미국의 협조없이 세계경제가 제대로 돌아갈까? WTO가 직면한 위기의 본질은 세계경제의 트릴레마다. 많은 나라들이 세계화와 민족국가와 민주주의라는 세 가지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없다는 한계를 안고 있다. 미국은 세계화를 제한하고, 중국은 민주주의를 배제한다. 한국은 세계화와 민주주의를 지키려 애쓰지만 국가 주권이 제약 받는 트릴레마에 내몰리고 있다.
세계 경제의 트릴레마를 해소하는 방법은 뭘까? 그 해법을 찾지 못한다면 WTO의 위기는 곧 세계경제의 위기로 이어질 것이다.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에는 그야말로 재앙이 될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