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게이츠의 어머니와 운영체제의 부재
마이크로소프트가 컴퓨터 산업의 새로운 여명을 열 수 있었던 이유
최근 빌 게이츠의 방한 소식에 3년 전 어느 대학교 강당으로 마음을 옮긴다. 때는 미국 서부 시각으로 2022년 6월 14일 오전 11시다. 장소는 UC버클리의 다목적 공연 시설인 젤러바흐홀이다. 거기에 마이크로소프트(MS)의 공동창업자가 왔다.
한 온라인 미디어가 마련한 테크놀로지 행사에 대담을 하러 온 빌 게이츠는 ‘기후위기’에 대한 모두의 관심을 고취하고 30분 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질문은 받지 않았다. 대담 내내 기회가 주어진다면 반드시 손을 들리라 다짐했던 터라 진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그럼에도 먼발치에서나마 빌 게이츠를 만났던 그날은 필자 인생에서 커다란 순간 하나로 남아 있다.
실리콘밸리에서 근무하는 동안 탐구에 몰두한 인물은 단연 스티브 잡스다. 하지만 필자는 애플 제품을 단 하나도 쓰지 않는다. 매일 MS의 ‘윈도우’로 작업하고 하드웨어는 IBM에서 레노버로 넘어간 ‘씽크패드’를 쓴다. 이런 개인적 모순을 타파하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은 결국 독서다.
전세계 대다수의 삶을 구성하는 컴퓨터 운영체제를 개발한 69세의 창업자는 올해 2월 자서전을 낸다. ‘소스 코드: 더 비기닝’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책에서 빌 게이츠는 자신의 출생부터 MS의 창업 초기까지를 다루고 있다. 그가 세상에 내놓을 세 권 분량의 회고록 중 첫 번째 편이다. 엄청난 독서가로 알려진 빌 게이츠답게 유려한 방식으로 어린 시절을 정리하고 있다. 필자가 책을 구입한 때는 연초지만 완독까지는 6개월이 걸렸다. 큰 인물의 삶을 이해하는 데는 숙성의 시간이 필요한 법이라고 믿고 싶다.
IBM과 계약, 게이츠 어머니가 촉매 역할
빌 게이츠의 성공에서 빠뜨려서는 안 될 인물이 그의 어머니 ‘메리 맥스웰 게이츠’다. 물론 그녀의 자식 양육방식은 뚝심이 있고 훌륭했지만 여기서 다룰 일은 아니다. 창업 초기 MS가 IBM과 계약을 따내며 비약적 발전의 계기를 마련한 데는 어머니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보다 객관적 시각을 확보하기 위해 자서전 ‘소스 코드’를 벗어나 1994년 6월 10일 시애틀타임스의 부고 기사를 살펴보자. 폴 앤드류스 기자가 쓴 기사의 제목은 “메리 게이츠 사망하다: 시애틀 시민사회의 지도자이자 빌 게이츠의 어머니, 암으로 별세하다”였다.
기사 중반부에는 메리 게이츠가 아들의 성공에 어떻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는지 힌트가 나온다. 1980년 누군가가 MS를 언급했을 때, IBM 사장인 존 오펠이 “아, 그거 메리 게이츠의 아들인 빌 게이츠가 운영하는 회사(Oh, that‘s run by Bill Gates, Mary Gates’ son)라고 답했다”는 부분이다. 당시 메리 게이츠와 존 오펠은 자선단체 ‘유나이티드 웨이’의 이사회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었다.
1975년 4월 4일, 20세의 젊은이가 뉴멕시코주 앨버커키에서 고등학교 동창과 공동 창업한 테크놀로지 회사의 명칭은 원래 ‘마이크로-소프트’였다. 마이크로컴퓨터의 소프트웨어를 만들겠다는 야심찬 회사는 각 단어의 앞부분을 따 이름을 지었다. 1년 반이 흐르고 이 회사는 가운데 하이픈을 빼고 ‘마이크로소프트’라는 이름으로 법인등록을 한다.
당시 컴퓨터 산업의 최강자는 IBM이었다. ‘국제 비즈니스 기계(International Business Machines)’라는 회사명답게 1970년대 IBM은 세계 메인프레임 시장을 지배했다. 하지만 개인용 컴퓨터 시장에는 선뜻 발을 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전문가가 “IBM이 개인용 컴퓨터를 만드는 것은 코끼리에게 탭댄스를 가르치는 것과도 같다”고 혹평할 정도였다.
육중한 IBM은 개인용 컴퓨터 시장에 진출하며 하릴없이 외주를 적극 활용한다. IBM은 1980년 개인용 컴퓨터 개발에 돌입하며 1년 안에 프로젝트를 마친다는 계획을 세웠다. 짧은 시간 안에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것은 무리였으므로 외부 공급업체의 소프트웨어를 라이선스 방식으로 구매하기로 결정한다.
‘초심자용 다목적 기호 명령어 코드’라 불리는 프로그래밍 언어 ‘베이식(BASIC)’을 개발해 보유 중이었던 빌 게이츠는 시애틀의 MS 사무실에서 전화 한 통을 받는다. IBM이었다. IBM의 소프트웨어 책임자 ‘잭 샘스’는 바로 비행기를 타고 플로리다주 보카러톤에서 워싱턴주 시애틀까지 날아와 다음날 어색한 정장에 어설프게 넥타이를 맨 젊은이들과 협상에 돌입한다.
잭 샘스를 비롯한 IBM의 개인용 컴퓨터 개발 책임자들은 틈틈이 진행상황을 존 오펠 사장에게 보고했다. “칩은 인텔이 제공하고, 유통은 시어스(Sears)와 컴퓨터랜드가 담당하고, 소프트웨어는 시애틀의 빌 게이츠라는 청년이 운영하는 MS가 맡는다”는 게 요지였다.
소프트웨어 산업이 갓 태동하던 1980년, IBM에 비하면 MS는 구멍가게 수준의 회사였다. 그럼에도 존 오펠 사장은 “오, 메리 게이츠 아들 말이지? 대단한 여성이야”라며 MS와 계약하겠다는 IBM 실무진의 결정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
선지자적으로 내다본 소프트웨어 시장
MS의 성공에 빌 게이츠의 어머니가 촉매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빌 게이츠는 소프트웨어 산업이라는 새로운 시장이 폭발하고 있음을 선지자적으로 내다봤다. 1980년 IBM은 MS와 계약을 진행하며 프로그래밍 언어 말고도 필요한 중요한 소프트웨어가 하나 더 있다고 말했다. 다른 프로그램의 기반 역할을 하는 ‘소프트웨어의 소프트웨어’, 즉 운영체제(OS)였다. 그때까지 MS는 운영체제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처음 빌 게이츠는 실리콘밸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몬터레이에서 ‘디지털리서치’라는 사업체를 운영하던 ‘게리 킬달’을 추천했다. 그가 개발한 운영체제 ‘CP/M’이 있으니 제안을 해보라는 뜻이었다. IBM은 게리 킬달을 찾아갔으나 캘리포니아의 자유분방한 히피 프로그래머 집단이었던 디지털리서치와의 협상은 쉽사리 진척되지 않았다. 디지털 리서치는 IBM이 요구한 ‘기밀 유지 협약(NDA)’ 서명부터 순순히 따르지 않았고 결국 계약은 최종 결렬됐다.
이 소식을 들을 빌 게이츠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시간이 없던 그는 운영체제를 보유한 회사를 물색해 프로그램을 사들이기로 결심한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마이크로소프트 사무실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시애틀 컴퓨터 프로덕츠’라는 작은 회사가 운영체제를 갖고 있었다. 회사에 재직 중인 한 엔지니어가 게리 킬달의 CP/M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자 이를 개작해 ‘QDOS’라는 운영체제를 내놓았다. ‘빠르지만 지저분한 운영체제(Quick and Dirty Operation System)’답게 QDOS의 완성도는 높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이크로소프트는 IBM과 협상하기 위해 QDOS를 완전히 매입했다. 최종 구매가는 5만달러다. 1980년 5만달러는 현재 4배 이상의 가치가 있으므로 적은 돈은 아니다. 하지만 1980년 MS 직원은 40명이었고 매출액은 800만달러였다. 향후 수십 년간 소프트웨어 산업을 지배할 운영체제의 원형을 푼돈으로 구입한 셈이다. 45년이 지난 현재 MS의 시가총액은 3조8000억달러에 달한다. 4조4000억달러를 기록한 엔비디아에 이어 세계 2위며 3조4000억달러인 애플이 MS를 뒤쫓고 있다.
게리 킬달과 빌 게이츠의 차이점 ‘집요함’
2004년 10월 25일 비즈니스위크의 기사는 ‘빌 게이츠가 될 뻔한 남자’로 CP/M의 개발자 게리 킬달을 다뤘다. MS가 QDOS를 개선해 IBM에 제공한 ‘MS-DOS’는 사실상 CP/M을 복제한 ‘클론’ 운영체제였다. 게리 킬달은 빌 게이츠를 찾아가 항의했다. 지금이라면 법적으로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겠지만 당시만 해도 이를 입증하기가 쉽지 않았다. 참고로 미국에서 소프트웨어 저작권법이 발효된 시기는 1980년 12월이다.
빌 게이츠는 게리 킬달과 무엇이 달랐을까. 비즈니스위크 기사는 킬달의 사업체 ‘디지털 리서치’의 변호사였던 제리 데이비스의 말을 인용하며 끝맺고 있다. “빌 게이츠는 집요한 기업가였기에 성공했습니다. 게리 킬달은 집요하지 않았어요.”
MS가 세계적 회사가 된 배경에는 운과 집요함의 결합이 있다. 무형의 산업이 태동하는 시기에 여명을 미리 내다본 한 창업가는 자신에게 찾아온 운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집요하게 매달렸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필자는 지금 MS ‘윈도우’로 이 글을 마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