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원용의 러시아 톺아보기

알래스카 정상회담 이후 미러 관계 전망

2025-09-16 13:00:45 게재

미·러 관계에 ‘신중한 낙관주의’ 기류가 흐르고 있다. 알래스카 정상회담(8.15)에서 실질적 합의는 없었지만 러시아는 외교 무대에 성공적으로 복귀했다. 무엇보다도 양국이 서로에게서 ‘공동 이익’을 향한 태세 전환 의지를 확인한 것이 큰 성과다.

알래스카 정상 회담은 미·러 관계의 질적 변화를 상징한다. 바이든정부 시기 상호 방문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음번 모스크바 정상 회담이 더욱 기대된다. 과연 러시아의 ‘외교적 승리’를 선언하는 최종 합의문이 나올지 주목해야 한다.

반면에 트럼프에게 알래스카 정상 회담은 스스로 빠진 함정에서 나오기 위한 출구였다. 트럼프는 당초 베이징과 뉴델리를 통해 모스크바에 효과적인 압박을 가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러시아의 고립이 아니다. 오히려 미·인 관계의 위기와 러·인·중 삼각체제가 가시화됐다. 한편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과 대러 제재 이후에는 미국이 대러 압박을 강화할수록 심각한 자상을 입는 ‘제재의 역설’이 발생했다. 그리고 마침내 다급한 미국은 러시아에 손을 벌려 함께 ‘강대국 정치’ 무대를 만들자고 제안한 것이다.

‘신중한 낙관주의’ 기류 흐르는 미러관계

알래스카 정상 회담 이후 몇 가지가 분명해졌다. 첫째, 미·러가 공유할 이익의 외형이 드러난 이상 미국은 우크라이나 문제 해결에서 모스크바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둘째, 트럼프는 러시아의 고립과 전략적 패배를 도모하는 모험주의와 절연할 것이다. 셋째, 유럽이 러시아의 가장 강력한 적대국으로서 초강대국의 위상을 상실하고 주변화의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미·러 관계를 전망하려면 이번 알래스카 공간의 상징성에 주목해야 한다. 과거 ‘거래’의 대상이었던 공간에서 역사적 기억(1867년 영토 매각)을 소환함으로써 거래에 의미를 부여했다. 당시 미·러는‘영국’의 제국적 야욕을 억제하기 위해 영토 양도에 합의했다. 지금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러시아의 승리로 종결되는 것에 극렬하게 반대하는 영국을 앞에 두고 있다.

둘째, 알래스카는 동쪽이다. 만일 서쪽에서 반러 정서의 유럽이 러시아와 미국을 갈라놓았다면 이제는 미·러가 동쪽에서 직접 대면하여 화해의 세기적 프로젝트를 만들어가는 논의를 하자는 뜻이다. 셋째, 알래스카는 미래와 만나는 공간이다. 북극항로(NSR) 활성화와 에너지 개발은 미·러의 중첩된 이익 공간이다. 이익 공동체로서 ‘거래’성사를 가정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크라이나 종전 의제에만 집중하면 회담의 성격과 본질을 놓칠 수 있다. 양국의 관심은 더 크고 높은 곳에 있다. 포괄적인 미·러관계 정상화가 그것이다. 물론 우크라이나 전쟁이 관계 발전의 장애물이니 그것을 치우는 것이 급선무다. 비극적인 현실이지만 ‘강대국 정치’가 지배하는 국제사회에서 우크라이나의 운명은 이미 예견되어 있다. 푸틴의 계획을 크게 벗어날 가능성은 없다. 신헌법에 명시된 신규 영토 인정, 우크라이나의 중립화 및 비무장화, 나토의 팽창 중단을 요구할 것이다.

최종적인 평화 협정, 넘어야 할 장벽 많아

결론적으로 알래스카 정상 회담이 ‘평화’를 향한 대전환의 시작이지만 최종적인 평화 협정 체결까지는 넘어야 할 장벽이 많다. 우선 러시아 외무장관 세르게이 라브로프는 트럼프의 종용으로 푸틴과 젤렌스키가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단언했다. 그저 트럼프의 ‘환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러시아는 대통령의 임기가 종료된 젤렌스키의 합법성을 문제 삼아 왔는데 법적 정통성이 없는 권력과 평화 협상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라는 입장이다.

푸틴 대통령은 9월 5일 동방경제포럼 본회의 토론에서 평화 협정 체결의 법적, 기술적 문제를 언급했다. 영토획정과 같은 사안은 계엄령 해제, 국민투표, 헌법재판소 결정 등의 법적 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현재 우크라이나 사법부의 기능이 무력하고 젤렌스키 정권의 방해와 제재로 정당한 권한 결정이 진행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국제사회의 조기 종전 압박을 피하려는 명분을 내세운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문제 해결의 복잡성과 난관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미국이 마치 러시아의 승리를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평화’를 구걸하는 것처럼 비춰지자 유럽이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하지만 이번 정상회담에서 유럽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유럽은 더 이상 강력한 집합적 존재가 아니다. 분열된 개별 국가들은 당장 각자도생을 고민해야만 한다. 미국과 보조를 맞추던 유럽이 미국보다도 더 강력한 대러 제재 조치를 단행하고 있지만 ‘제재의 역설’은 유럽의 경제를 갉아먹고 있다. 현재 누가 보더라도 미국의 행태는 이기적이다. 경제적 이익은 미국 쪽으로 당기고, 비용은 유럽에 전가한다.

미국이 유럽을 어떤 면에서 경쟁자, 또는 수탈할 원천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오래전부터이지만 트럼프 집권 이후 그 본질은 더 노골적인 양상으로 변모했다. 러시아의 대외국방정책위원회 위원장 표도르 루키야노프의 견해에 따르면 유럽이 자신의 ‘이익’이 어디에 있는지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한 채 그저 미국의 노선만을 추종하다가 자초한 것이다.

현재 알래스카 회담의 성격과 성과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일부 논자들은 알래스카 회담을 가리켜 실질적 합의는 없고 화려한 외교적 이미지만 연출한 극장과 같았다고 평가절하한다. 하지만 또 다른 일각에서는 평화 프로세스가 성공적으로 이어진다면 국제관계 체계의 새로운 단계를 상징하는 사건이 될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향후 미·러 관계 개선은 중·러 관계의 향방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현재까지는 러시아가 미국의 반중 봉쇄에 동참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미국이 중국에 대한 균형추로서 러시아의 역할 증대를 기대한다면 미·러 ‘공동 이익’지대가 만들어질 가능성은 충분하다.

최근 몇몇 긍정적인 신호가 나왔다. 현재 미·러 양국은 북극항로와 에너지 프로젝트를 매개로 상호 견인 가능성을 시험하고 있다. 미국 석유 메이저 엑손모빌이 러시아의 국영 에너지 기업인 로즈네프트와 비밀 회담을 갖고 3년 전 철수한 러시아의 극동 에너지 개발 ‘사할린-1’ 프로젝트에 재진출하는 방안이 논의됐다. 또한 러시아의 노바텍이 주도하는 북극의 ‘Arctic LNG-2’프로젝트용 장비를 미국에서 구매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푸틴 대통령은 지난 5일 제10차 동방경제포럼(EEF) 본회의에서 아태지역에 속한 미국에도 러시아와 협력을 재개하거나 새로운 협력을 시작하고자 하는 ‘이해당사자들’이 매우 많고 알래스카에서 미국 기업들과 협력할 좋은 제안들이 있다고 밝혔다.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는 준비되어 있고, ‘정치적 결정만 내려진다면’ 언제든 러시아가 앞선 동토층 가스 채굴 및 액화기술을 미국에 지원하고 북극에서도 공동 협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다만 푸틴의 이 발언을 해석할 때 좀 더 세심함이 필요하다. 미국이 대미 관계 개선을 원하는 러시아를 향해 미-중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할 때 ‘중국’을 버릴 수도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푸틴은 위의 발언 뒤에 곧바로 “때마침 중국 친구들과도 몇몇 북극 유전에서 3자 협력을 할 가능성을 논의했다”고 언급했다. 한마디로 러시아는 아태지역과 북극 협력에서 중, 미 모두를 포용하겠다는 뜻이다.

러시아, 아태지역과 북극협력에 미중 포용

결론적으로 러시아는 트럼프가 보내는 미·러 관계 개선 신호를 의미 있게 받아들이지만, 트럼프의 화해 제스처와 유인에 환호성을 지르기보다는 침착하게 러시아의 국익을 고수하겠다는 입장이다. 러시아는 미국과의 화해를 위해 중국과의 전략적 관계를 훼손하지는 않을 것이다. 미·러 관계 개선과 관련하여 ‘신중한 낙관주의’로 기울고 있는 분위기는 역력하지만 아직은 기대도 실망도 시기상조다.

인천대 교수 동북아국제통상물류학부